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올바른 실천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악기 연주가 그렇듯이 종교도 그러한 것이다. 음악은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니며 종교도 그렇다. 신앙이란 '실제 삶의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 신앙이란, 사람들이 행하는 무엇을 뜻한다. 그것은 즉 '부를 나누고 정의로운 일을 행하며 땅바닥에 엎드려서 자기를 배우고 자아를 굽히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종교적 체험은 일상생활과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종교는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비움 또는 케노시스

어딘가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올 때, 이를테면 영화나 소설에 몰입한다든가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었다든가 할 때, 내면으로부터 느껴지는 시원한 쾌감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해방감이다. 몰아는 자아(ego)의 틀 '밖에' 서는 것이며 신을 체험하는 것도 그와 같다.

우리가 애써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가고 무서운 영화를 찾아보고 좋은 음악에 심취하고 또 나쁘게는 마약에 빠지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협소한 나의 자아에서 벗어나 내 존재를 고양시키고 싶은 본능적 몸짓은 아닐까?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일상 밖에 서는 엑스타시스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우리가 매일의 경험 속에서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자기를 넘어설 때 경험하는 초월적 체험은 종교적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해석적

종교적 담화는 본래 해석적이다. 이를체면 성서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된다. 그것은 절대불변이 아니라 매번 다르게 해석된다. 유대인들의 토라는 성서에 대한 해설서인데, 이 토라는 다시 이렇게 정의된다. '토라는 토라에 대한 해석'이다! 성서든 불경이든 20세기 한국에서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비

중세의 위디오뉘시우스는 신의 형언불가능함을 '...도 아니고 ...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한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성의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헤아릴 수 없는 타자'인 것이다. 우리는 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겪을' 뿐이다. 신이란 무엇인가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존 카푸토는 우리가 무엇을 욕망할 때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없는 무엇을 욕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고. 신에 대한 질문도 이와 비슷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

어느 종교든, 사랑을 말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일 때 신성을 체험할 수 있기에. 연민과 공감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타인과 연결될 때, 선함 속에, 친절함 속에,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무엇이 머무는 것을 느낀다.

 

신 앞에서

리처드 도킨스로 대표되는 무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구체적이고 뚜렷한 특정 모습의 신이다. 하지만 신은 진정 무엇일까? 신의 본질은? 그것은 우리의 지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 

우리는 구약의 욥처럼 신 앞에서 그저 말을 잃고 손으로 입을 가릴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