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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 A Peta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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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문체와 시점 변화를 영화에서는 어떻게 처리했나?

   원작의 문체 : 광주민중항쟁이란 거대한 주제를 한 미친 소녀의 내면 독백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서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섬세한 문체는 일면 거대한 서사를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살육의 현장을 낱낱이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실존의 문제에 더 치중한 듯도 하다. 이런 낯설음으로 독자들과의 간격 좁히기에는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상징과 치밀한 문체로 소설의 형식미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독자들은 소녀의 내면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어차피 살육의 현장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조각그림을 맞추듯, 독자들의 능동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원작의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소녀의 내면 시점, 우리들의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독자들에게 소녀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독려하고 있다. ‘우리들 시점’은 그것을 통해 역사적 비극을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여야 함을 일깨운다. ‘소녀의 시점’에서는 자신을 미치게 하고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영화의 문체 : 영화는 시종일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광주항쟁을 보여준다. 이 기법은 광주의 상처가 영화 속의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화면처리도 독특하다. 영화의 주인공인 소녀의 ‘지금’과 광주의 ‘그날’은 각각 칼라와 흑백으로 구분되어, 미친 소녀의 파편화된 의식처럼 자주 교차한다. 또한 이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녀의 꿈은 에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하여 그 불가해함을 강하게 나타내었다. 

  영화의 시점 : 원작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장씨와 소녀의 서사. 우리들의 서사. 소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개인적 문제     


 절름발이 사내 ‘장’의 캐릭터 분석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장’은 절름발이로 나온다. 이는 소녀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설정인 듯하다. 장은 소녀의 아픔과는 다르지만 그 나름으로 아픔이 많은 생을 견뎌온 것 같다. 미쳐버린 소녀를 보며 장은 차마 미쳐버리지도 못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그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거울처럼 자기의 아픔을 낱낱이 비추는 소녀를 폭행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소녀의 내력을 제 나름으로 짐작하게 된 장은 결국 소녀에게 따뜻하게 대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김 오르는 물에 소녀를 씻기는 장면에서 그런 점은 두드러진다. 너무 거창하고 멀리 나갔는지는 모르나, 세례를 주고받는 종교의식과도 같은 느낌을 나는 받았다.

영화에 나타난 아이러니와 그 효과

  국기 강하식 : 저녁 6시에 맞춰 국기강하식이 진행되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온다. 시장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선 채 애국심을 다지고. 소녀는 사람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뚫고 간다. 국기를 내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국민에게 일제히 애국심을 표하는 몸짓을 하도록 정한 국가와 그것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엄숙한 표정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국가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미쳐버린 소녀의 가로질러가는 행동에 의해 국가가 통째로 부정된다.

  석가 탄신일 : 무장한 군인들이 비무장한 국민들을 무차별로 난타하는 광주의 금남로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찢겨져서 날린다. 살육의 현장이 되어버린 곳에 자비로움과 살생을 금하는 부처의 탄신일을 알리는 현수막이 날리는 것은 극명하게 대비되며 살육의 현장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버스 광고 문구 : ‘80만의 질서 활기찬 광주’라는 버스 광고판의 문구가 눈에 띈다. 무질서하고 무법천지로 변해버린 아비규환의 광주가 더욱 강조된다.

  간첩 신고소 : 시장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소녀를 주시하는 장이 서 있는 건물 벽에 ‘간첩 신고소’라는 패가 붙어 있다. 노동자들의 대화 중 광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국의 간첩이 모여 난동을 부렸다는 대목이 나오고, ‘자네들 빨갱이 아니여’ 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국가가 거짓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광주 오월’을 대하는 소설가와 감독의 태도에 관해


  소설가 최윤 :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에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서 있는 인물들의 내면에 역사적 의미가 깊이 새겨지는 방식을 통해 역사 속에 처한 인간의 내면 변화를 정밀하게 그려냈다. 이 같은 역사와 인간의 우회적인 결합방식은 형상화의 힘을 얻어 역사적 사실의 직접적인 재현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역사의 본질적인 측면을 밝혀준다. 역사에 대한 간접적인 형상화를 거치면서 역사적 사실은 인간 본연의 내면문제로 귀결된다. 역사라는 외부세계의 체험은 억압과 고통의 역사라는 시대적 의미를 넘어서서 한 개인으로서 가지는 존재론적 문제로 심화된다.

  감독 장선우 : 원작자와 달리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사회 고발을 하고 있다. 5월 광주 항쟁의 기록물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삽입하고, 소녀가 강간당하는 장면에 군복을 클로즈업하는 따위의 장치로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국가와 당대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맹렬하게 퍼붓는다. 이는 원작자가 프랑스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광주항쟁을 접한 것과 달리, 감독 장선우가 항쟁의 현장에 있었으며 운동권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죄책감의 층위에 대하여 - 소녀, 사내 ‘장’, ‘우리’

  소녀 : 구멍 뚫린 엄마를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덩이같이 뜨거운 엄마 손을, 자기 손을 꽉 잡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엄마의 팔을, 발로 짓뭉개고 도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엄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그렇게 하면서 비겁하게 도망친 것 때문에 엄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결국 엄마는 자기가 죽였다는 죄책감. 개인이 개인에 대한 죄책감.

  사내 ‘장’ : 아픔을 견디다 못해 미쳐버린 소녀를 강간하고, 무시로 폭력을 가한 것에 대한 죄책감. 좀 더 따뜻하게 보살펴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죄책감. 사회의 개인에 대한 죄책감.(‘장’을 내세워서 장과 유사한 부류, 이를테면 소녀를 강간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죄의 층위를 드러냄)

  ‘우리’ : 친구에 대한 연민과 도리로 소녀를 찾아다니기는 하나 좀 더 적극적이지 못함에 대한 죄책감. 지식인이나 정부기관, 국가가 약자인 개인에 대해 가져야 할 죄책감.

 ‘검은 휘장’의 상징성에 대해 

  견디지 못할 고통을 은폐시키려는 소녀의 마음이다. 자기의 죄책감과 그 죄책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고개 돌려버리려는 마음의 상징이다. 결국 검은 휘장으로도 어쩔 수 없어 소녀는 미쳐버린다. 하지만 미쳐서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 걸음 더 나가 보면,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을 알리는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인부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광주 항쟁의 사실이 얼마나 왜곡된 채로 항간을 떠돌아다녔는지가 잘 드러난다. 광주 항쟁의 실상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검은 휘장 저 너머의 일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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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 The Ho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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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프 전집 간행 위원회가 울프 전집을 발간하며 쓴 서문에는 왜 지금 울프를 읽어야 하는 가 하는 글(아래 글 참조)이 나온다. 그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그녀의 문학이 인간주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가 그녀의 작품에서 페미니즘을 넘어서서 인본주의를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스스로가 세운 바로 그 왕국에서 점점 더 소외되어간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사랑’이라는 올가미로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기실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고통을 느낀다. 자유를 속박당하고 억압당하는 것이다. 세상이 비대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작아진다. 아무리 세상이, 문명이, 발달하여도 사람은 다만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매 순간이 일생이고, 매 하루가 일생이다. 한 순간의 행복을 부여잡고 어제와 같은 내일을, 모레와 같은 어제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과거완료형이며 미래완료형이다. 개개인의, 개체의 유한한 삶을 담보로 종족의 삶은 영위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기실 삶은 대단한 어떤 것들로 이루지지 않는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우리의 시간은 채워지며 그 시간들이 모여서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시간의 영속성.

  사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우리의 의식도 발 딛고 선 현실의 지배를 받으며 변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원형적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또 미래의 어느 날이나 매한가지이다. 지금 나는 과거의 누군가가 살았던 삶을 되풀이해 살고 있으며, 미래의 누군가는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다시 되풀이해 살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하여 그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아니 관객 스스로가 깨닫기를 바란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서로 동떨어진 세 개의 시대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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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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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고-

  ‘칸느’가 2006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선택하였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것도 왕가위를 비롯한 심사위원단 아홉 명의 만장일치로. 나는 내 또래 중에서는 비교적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의 영화평이나 미리 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서 읽어보고, 어떤 영화를 볼지를 결정할 때가 허다하다. 그런 터라 수상에 관한 기사를 읽는 순간 꼭 봐야 할 영화목록에 이 영화를 기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 하나, 제목을 보는 순간, 그것은 내 마음 안으로 바람에 떠밀린 듯 들어왔다. 아마도 그때 김수영의 ‘바람보다 풀이 먼저 눕는다’라는 구절이 내 속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면서 보리밭 속에 뭔가가 숨어서 꿈틀거리는 듯, 내 속에서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제목은 대단한 무엇의 은유이지 싶었다.

  기다리던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끝끝내 이 도시의 휘황찬란한  개봉관에서는 개봉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참 다행하게도 딱 하나 있는 예술영화전용상영관에서 개봉을 하였다. 난방도 시원찮고 의자도 낡을대로 낡아 딱딱한 곳에서 말이다. 난 기꺼운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이전에도 봐야할 영화목록에 적어놓고 기다리다가 결국 보지 못한 영화가 여럿 있는데, ‘잭슨 폴락’도 그 중 하나다. 운이 좋아서 이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보기는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영화의 대중성과 예술성의 삐걱거리는 아귀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운명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두 형제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삶 중에서도 특히 신념과 그 신념에 따른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1920년 아일랜드, 젊은 의사 데이미언(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은 런던의 병원에 일자리를 얻지만, 영국군의 횡포에 친구 미하일이 죽는 사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 사건은 이전까지 저항에 무관심했던 그가 저항군에 가담하는 동기가 된다. 결국 데이미언은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그의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 Padraic Delaney)가 이끄는 IRA(Irish Republican Army)에 가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다. 영국군의 무기를 탈취하는데 성공한 그들은 어느 날 내부자(크리스)의 밀고로 잡히게 되고, 형 테디는 뺀치로 손가락이 잘리는 호된 고문을 받는다. 이를 지켜본 아일랜드계의 보초병이 이들을 풀어주어, 그들은 그 보초병과 함께 탈출한다. 밀고자가 크리스임이 결국 밝혀지고, 밀고자를 단죄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데이미언은 크리스를 총살한다. 사실 그 둘은 오랜 고향의 선후배 사이이다. 의사였던 데이미언은 울면서 크리스의 심장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는데, 그때 그가 한 말이 “조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지”라는 것이다. 크리스는 자기가 단죄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는 듯했다. 홀로 계신 엄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라는 데이미언을 향해 크리스는 말했다.

  “엄마가 글을 읽지 못하므로 편지는 소용이 없어요.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었던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겠다며 자기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데이미언에게 크리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형, 무서워!” 

마침내 그들이 염원하던 영국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그 와중에서 아일랜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혼란에 휩싸인다. 평화조약이 아일랜드의 반쪽(저항이 거센 남부)만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다. 두 형제의 의견도 서로 엇갈린다. 우선 조약을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자고 하는 형 테디에 반해 데이미언은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조약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투쟁을 계속하자고 한다. 결국 형제는 자기의 신념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간다.

  결국 저항을 계속 하던 데이미언이 잡히고, 형 테디가 그를 총살한다. 처형 전날 밤, 테디는 데이미언을 회유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쓴다. 그러나 데이미언은 밀고보다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 어린 크리스를 밀고자라는 이유로 총살한 바로 그 자신이 밀고자가 될 수는 도저히 없어보였다. 형은 기둥에 묶인 동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고는 쓰러져 널브러진 동생을 안고 오열한다.

  아일랜드의 상황이 우리 민족의, 우리 조국의, 지난날과 너무 흡사해서였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여럿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데이미언이 크리스의 심장에 총을 겨누는 장면과, 형 테디가 데이미언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에서는 눈을 감고, 감은 눈을 두 손으로 덧가렸다. 내 속에서 이상한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덩어리가 목구멍을 치밀고 솟아나올 것만 같았다. 데이미언에게 그만 밀고를 해 버리라고, 목숨을 구걸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대신 처형을 실행해 주겠다는 부하의 제의를 거절하고 끝끝내 자신이 총을 겨누는 테디에게도 외치고 싶었다. 제발, 총을 부하에게 건네라고! 부디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것만이라도 피하라고! 

  감독은 내 간절한 바람을 끝끝내 저버리고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갔다. 동생의 식어가는 몸을 안고 통곡하는 형을 보는 동안, 내 눈에는 크리스를 죽인 후 괴로워하던 데이미언의 얼굴이 오래도록 겹쳐서 보였다. ‘형, 무서워!’ 라고 말하면서 최후를 맞이하던 크리스. 크리스의 죽음을 전하는 데이미언과 함께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그 긴 시간동안 끝끝내 침묵하던 크리스의 어머니. 그녀가 무덤을 돌아본 뒤 데이미언에게 건넨 단 한 마디,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그 말을 툭 내던지듯 내뱉던 그녀의 허허로운 얼굴도 겹쳐서 보였다. 그들 모두는 조국을 위해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체념인 듯도 하였다.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은 1920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6년 4월, 부활절 기간 동안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일어났던 무장봉기가 있다. 예이츠의 시 「1916년 부활절」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그 시를 찾아 다시 읽었다. 영화를 보기 전과는 사뭇 다른 아픔을 느꼈다. 아일랜드의 이 일련의 사건들은 아일랜드의 특수한 사건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1922년 12월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하지만, 이 사건은 과거를 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캔 로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 역사는 언제나 나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테마이며. 이 영화가 현재의 이라크전과 같은 사건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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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 Chang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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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머리 여고생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그 여고생은 동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대구로 유학을 온 소녀였다. 전교생이 일천오백명 정도 되는 규모의 중학교에서 거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아이였다. 해서 아이의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대구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아이는 외교관이나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는 처음에는 주춤거렸지만, 이학년이 되면서는 우등생 대열에 합류하였다.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대학입시에만 열중이던 삼학년 때의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은행에 입사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전교석차 5등 이내의 성적이 되는 학생만 지원이 가능한 성적우수자 특별채용이었다. 선생님은 은행에 취업하면 얻게 되는 이득들을 여러 번 강조하며 권하셨다. 이러저러, 망설임과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면접과 신체검사마저 통과하였다. 여름방학에 연수를 받고 이학기가 시작되는 구월 중순에 한 지점 근무를 발령받았다. 본점에서 사령장을 받을 때 아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전자계산기가 한 지점에 달랑 한두 대 있던 시절이었다. 모든 계산은 주산이 감당하였다. 소녀는 이제 어엿한 여자가 되었다. 여자는 주산부터 배워야 했다. 포기한 대학은 은행일에 능숙해진 뒤에 야간대학을 가리라 마음먹었다.  10시에 은행업무가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도시락을 사서, 새벽 단과반 강의를 듣고 학교에 갔다가,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던 날들에 비해, 출근시간은 너무 늦었고 퇴근 시간은 너무 빨랐다. 여자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여세로 은행 일을 열심히 배웠다. 주산실력도 제법 늘었다. 

  첫 달치 월급을 받아든 여자는 기쁨에 앞서 너무 놀랐다. 함께 연수를 받고 한 날, 한 장소에서 사령장을 받은 입사 동기인 남자의 월급과 여자의 월급이 차이가 났다. 결코 적은 차이의 액수가 아니었다. 여자의 한달치 본봉이 칠만육천몇백원이었다. 여자가 선배에게 물었다. 뭐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왜 차이가 나느냐고? 차이의 원인이 뭐냐고? 여자의 입사 성적은 결코 남보다 뒤지는 성적이 아니었다. 선배는 성적이 아니라 성기의 차이라고 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제서야 여자는 입사시에 적었던 '결혼각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겠다는 '결혼각서'를 적으면서도 아직 학생의 신분이었던 그때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가 혼몽하였다. 그저 절차상의 요식행위인 양 건성으로 적었다. 그렇게 시작된 성기의 차이는 막강하고 방대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급여의 차이는 각도기처럼 벌어졌고, 몇 가지의 업무는 아예 담당해보지도 못했다. 세금 따위를 받는 업무나 예금을 담당하는 업무가 주로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남자들은 자기들이 대단히 복잡한 은행의 중추업무를 담당하고 있노라며, 목과 어깨에 무형의 깁스를 하고 다녔다. 

  여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내내 공학으로 다녔는데, 여학생이라고 차별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여학생은 전교 1등을 하면 안된다거나, 등교를 남학생보다 더 일찍해서 학교청소를 남학생보다 더 많이 해야 한다거나, 하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기 때문에 '결혼 각서'를 쓰야 하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결혼을 하면 여자가 바보가 되는 것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통 여자들이 25세 전후가 되면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은행에는 나이 많은 처녀가 거의 없었다.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하겠다는 각서에 따라, 퇴직하였으므로. 24세에 실질적인 결혼을 한 내 동기가 있었다. 비밀결혼이었다. 몰래 결혼을 하고 동거를 시작하였으나, 서류상으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말짱 미혼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친정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처녀가장이었으니, 달리는 방도가 없어 보였다. 어떤 선배는 29세가 되도록 결혼을 미루고 연애만 하고 있었다. 약혼자가 고시준부를 하는 중이어서 그 선배가 당분간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직원들은 조금씩 꿈틀거렸다. 전국의 금융권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이 함께 뭉쳤다. 한마음으로 서명운동부터 시작하였다. 주동자들은 오지의 지점으로 발령을 받거나, 그와 유사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런 불이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아마도 잘 지내던 책임자들의 질시를 받는 것이었을 것이다. 질시와 학대를 견디다 못해 퇴직을 한 선배들도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가는 물줄기도 여러 개가 합해지면 큰 물줄기가 된다. 물줄기는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마침내, '결혼각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근무환경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졌다.  

  90년대가 되어서는 여자 과장이 간간이 가물에 콩나듯이 돋아났다.  

  90년대 중반에 여자는 과장이 되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놀라운 상을 받으면서 나름대로는 승승장구하면서 버티다가 98년 말에 명예퇴직하였다. 명예퇴직에 관한 여러 일들은,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계신 바와 같다. 무엇에 대한 명예인가? 내 한 몸을 던져 회사를, 은행을, 나라를 구하는 명예? 그 몸 던지는 일을 할  때 왜 연약한 여자들을 최전방에 내세우는지?  총알받이? 논개의 후예들이어서? 

  1920년대 미국의 L.A에 한 여자가 있었다. 아니다. 한 엄마가 있었다. 아니다.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억척같고 악착같은 아주머니. 여러 남자가 치를 떨고 고개를 절래절래 내어흔들게 한 아주머니. 

 영화'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  

  억지와 무식과 무기로 무장한 경찰 수뇌부의 구조적인 폭력. 그 폭력의 존재를 모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그 폭력의 집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약자들, 그리고 아주머니.  

  영화에서는 코드12로 분류되는 정신병원의 여자들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코드12로 분류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된 남자들도 있었을까? 영화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약자들 중에서도, 특히 여자들이 받는 대우는 미국이라고 해서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인공 아주머니는 전화국에서 일을 하는, 이혼녀이다. 영화에서 남자 상사가 하던 말이 인상 깊었다.  <교환수들을 관리하는 팀장에 크리스틴을 추천한 사람이 자기인데, 그 역할을 잘 해줘서 고맙고 다행이다.>라고 격려하던 말. 그 상사는 크리스틴에게 여자로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짐작건대, 그  시절에는 미국에서도 여자 책임자는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틴의 아들 월터가 실종되던 날, 크리스틴은 쉬는 날인데도 업무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타로 출근을 했다. 크리스틴은 잠시의 휴식도 반납한 채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월터의 실종 사건에 가려져 있지만, 조금만 눈길을 모로 돌려서 보면, 크리스틴의 업무 태도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보인다. 나 역시 미국보다는 50~60년 이후이지만 그런 상황을 보고 또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명예퇴직이 한창 진행되던 어수선한 시절에 우리 지점의 차장은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은행의 수뇌부가 되면 25세가 넘는 여자들은 모두 집으로 보내겠다고. 그 말을 듣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내가 한 마디 물었다. "차장님도 딸만 둘 두셨는데, 그 아이들이 25세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오면 어쩌죠?" 차장님 왈, "그때쯤엔 세상이 확 바뀌어져 있겠지 뭐." 그럴까? 불과 몇 년 사이에. 차장과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이. 그냥 저절로?  

  어쨌거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내가 근무한 은행에서도 90년대를 지나면서 여자 과장이 듬성듬성 뿌리를 내렸다. 나는 95년에 과장이 되었는데, 나보다 더 앞서 과장이 되었던 여자 선배들은 정말 몸이 부서져라고 일을 했다. 거의 악을 써댔다고 해야 맞는 말이리라. 맨 처음에 진급을 했던 선배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랬다. 남자들은 당연히 근무연수가 차면 되는 일을 여자는 악바리, 혹은 마녀, 마귀할멈 소리를 들을만치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다. 승진을 하고 나서도 두 어깨는 지점 하나를 혼자 짊어진 것보다도 더 무거웠다. 자기가 어떻게 역할 수행을 해 내느냐에 따라서 후배 여직원들이 계속 승진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매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켜 보니 신통찮더라, 하는 말이 나올까봐서였다. 어, 시켜 보니 생각보다 성과가 좋아, 하는 말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여자 관리자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이제는 지점장의 수도 여럿 된다. 남자에 비해 숫자라고 할 것조차 없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사람은 각자 자기의 내면의 거울로 세상을 본다. 나는 권력 집단의 구조적인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 <체인질링>을 보면서, 모두가 한 방향으로 보는 그것 외에 위에 적힌 것들을 더 봤다. 20년간 은행에 출근하는 동안 쌓이고 쌓인 피해의식 때문이리라. 성적의 차이가 아니라 성기의 차이라고 하던 선배의 충고 때문이리라. 서명운동을 주도하며 은행에 항의하다가, 결국 사표를 써야 했던 선배의 얼굴이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중도에 폐기처분되었던, 입사 서류에 첨부했던 <결혼각서>가 내 안에서 아직도 숨쉬고 있기 때문이리라. 

  감독 클린트이스트우드는,  <체인질링>의 화면과 화면 사이에 참으로 많은 말들을 숨겨놓은 것 같다. 시인이, 행간에 더 많은 말들을 숨겨놓은 것처럼.  

  나는 이 영화를 감독의 이름을 보고 선택하였다. 졸리가 아니라 클린트이스트우드라는 이름 때문에. 클린트이스트우드는 이제 꽤 나이가 많다. 나는 하마 안타깝다. 부디 오래 건강해야 할 텐데. 우리를 일깨우고 권력과 폭력의 뒤통수를 치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야 할 텐데.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것들을 부디 오래 많이 해내어야 할 텐데. 

  <체일질링>을 보면서 영화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빗물처럼 스며들어 천둥처럼 내 속을 뒤흔드는 부드럽고 광폭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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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 소리, 침묵을 침묵하게 하는.

 

  벼르고 벼르다 <워낭 소리>를 보러 시내에 있는 영화관엘 갔다. CGV. 사실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성아트홀에서 보낸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메일을 보던 당시에 나는 영화를 보러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정초에 한 치질 수술 때문이었다. 수술 부위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부담이 됐다. 더구나 동성아트홀은 의자 상태가 좀 그렇다. 동성아트홀은 오래전 소극장이었던 것을 시설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의자는 머리 받침대가 없는데다가 등받이도 낮다. 바닥도 푹신하지 않아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자면 성한 몸이라도 온몸이 뒤틀린다.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아무리 보고 싶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수술을 하면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 아직은 너무나 생생한지라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혹시 장기상영이라도 하면 그때 형편을 봐서 가든지 해야지,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서 CGV에서도 상영을 시작했다. CGV의 의자 위에서라면 고난의 행군 뒤인 내 엉덩이도 무사할 것 같았다. 상영시간도 75분밖에 되지 않으니.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면 봐야 할 이유가 떼거리로 몰려드는 법이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자고 맘을 먹으면, CGV에서 영화를 본 이유가 더 있다. 다들 짐작하듯이, 그렇다. 돈 문제다. CGV에서 조조 영화를 보는 데에는 이러저러 할인을 받아서 단돈 천원이면 된다. 그런데 동성아트홀에서는 육천 원이나 든다. 여섯 배나 차이가 나는 금액에 스크린을 포함한 제반 시설이 월등하다면 내 선택은 당연지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문자답한다. 예술영화관의 광팬이라 자처하는 스스로에게 뭔가 그럴싸한 이유를 대야 하겠기 때문이다.

  마침 이 글을 쓰기 전에 읽은 대구매일신문에 난 기사 때문에 서두가 길어졌다. 마니아층이 두텁지 않은 예술영화에 눈길도 거의 주지 않다가 흥행이 될 만하자 뒤늦게 상영을 시작한 대구 CGV를 두고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짜잔, 고대하시고 기대하시던 영화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화면에, 자막이 떴다. 
  허걱! 자국 영화에 자막이라……. 
  난 경상도 사람이고 둘째 형부가 영주 토박이어서 영화의 주인공인 할배와 할매의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할배와 할매는 연배로 보나 말투로 보나 잔소리하는 습관으로 보나 연판 우리 아버지와 엄마 같았다. 간간이 자막이 저절로 눈에 띄어서 읽었는데, 아무래도 엉성했다. 그들의 정서를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개념이나 의미만 전달하는 듯하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김없이 자막에 기대는데, 그 또한 이와 같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영화보기는 반보기(half see)밖에 되지 않으리라. 그러리란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오늘은 그것에 대해 유난히 더 씁쓸하고 찜찜한 기분이었다. 맨 처음 자막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던 나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막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사람들보다 더 많을 것 같았다. 나 또한 제주도 방언 앞에서는 그럴 것이다.   

  소의 제를 지내기 위해 청량사 계단을 오르는 노부부.

  이어서 나오는 소머리 부분의 그림자.

  소의 앞발을 닮은 듯한 노인의 손, 손가락. 손 옆으로는 구릿빛 워낭 하나.

  그리고,

  신발. 목 부분을 도려낸.

  그 신발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세 번 나온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구두가 겹쳐서 떠올랐다. 진중권의 저서 <미학오디세이2>에 적힌 그 <구두>에 대한 글을 옮겨 적는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영화의 신발에는 위에다가 덧붙여야 할 게 더 있다. 
  할배의 신발에는 장애를 입은 왼쪽다리의 절뚝거림이, 절뚝거리는 다리와 발의 리듬이, 그 리듬과 바람이 함께 뒤섞여 어우러지는 출렁거림이 그득하다. 할배가 그것을 신고 있을 때나 혹 벗어놓았을 때마저도. 

   

  할배의 투박한- 투박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투박한- 손과 손가락. 그 손은 바로 내 아버지의 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땜쟁이었다. 
  아버지의 열 손가락은 함석에 베이고 연장에 스치고 염산이 튀어 갈라지고 트고 거칠었다. 그 손가락들에는 언제나 허연 대일반창고가 둘둘 감겨져 있었고 함석냄새와 맨소래담 냄새가 범벅으로 들끓었다. 아버지는 그 손으로 양동이와 두레박을 만드셨다. 마을의 여인네들이 공동우물에서 새벽마다 그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 아버지는 함석으로 무엇이든 만드셨다. 쓰레받기, 물조리개, 세숫대야. 바케스, 촛대……. 아버지는 그것들을 만들 뿐만 나리라, 그것들에 구멍이 나면 구멍을 때우셨다. 평생을 구멍 때워 식구들 목구멍을 메운 아버지. 늘 구멍을 때우기만 하던 아버지가 딱 한 번 구멍을 뚫은 적이 있었다.

  내가 열 살 무렵이었다. 어느 겨울날, 변비가 심했던 나는 요강 위에서 꼴딱 시퍼런 밤을 새웠다. 푸른 목단꽃이 그려진 하얀 사기요강. 밤새도록 요강 위에서 씨름을 하고도 나는 볼일을 보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신 아버지가 건넌방으로 건너오셨다. 거칠거칠한 새끼손가락에 보드라운 비닐을 감고 계셨다. 굵고 투박한 새끼손가락으로 아버지는 내 똥구멍을 파내주셨다. 한겨울,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꽁꽁 언 내 손과 발을 주물러주셨다. 녹이지 않고 바로 아랫목에 넣으면 탈난다, 하고 일러주시며.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8남매를 키우셨다. 영화 속의 할배는 9남매를 길렀다고 했다.

   

소의 친구인 그 할배는 왼쪽다리가 성치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왼쪽 갈빗대가 두어 개 없다. 군대에서 걸린 결핵의 후유증이다. 할배는 무릎으로 온 논밭을 기어 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함석 처마 밑으로 들이치는 빗줄기처럼 몸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할배의 친구는 소와 라디오였다. 
  소가 아파서 식욕을 잃으면 여물 대신 할배가 먹는 밥을 먹였다. 할배가 쓰는 것과 같은 그릇에 담긴 쌀밥. 그 그릇에 막걸리도 부어서 먹였다. 그런 소가 1년도 채 더 살지 못할 거라고 수의사가 말했다. 할매의 성화에 할아버지는 소를 타고 우시장에 갔다. 그러나 할배는 애당초 소를 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일백만 원을 겨우 쳐주려는 소를 오백만 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소를 팔려고 집에서 차비를 차릴 때, 소의 눈에서는 끈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소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소의 눈물은 사람의 눈물보다 더 어둡고 더 끈적거렸다. 더 쓰라리고 더 환했다. 소의 언어는 무엇일까? 사람처럼, 소도 제 언어의 감옥에 갇힐까? 모르긴 해도 소의 언어는 능소화 꽃잎보다 더 활활거리고 제비꽃 꽃이파리보다 더 여릴 것 같다. 소는 자기만큼이나 마르고 기운이 없는 저 오랜 친구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할매는 내내 할배에게 있어 소는 업이라고 했다. 나는 도로 할배가 소에게 업으로 보였다. 

  할매는 입만 떼면 잔소리를 해댔다. 
  할배는 잔소리에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건 할배가 잔소리를 견디는 방식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할매의 잔소리 또한 고단한 나날을 견디는 방식일 것이고. 할매는 농치듯 말씀을 하시지만, 나는 그런 할매가 무척 외로워보였다. 늘 할매보다 소를 먼저 챙기는 할배에게서 할매는 자주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소가 힘들어하면 할배는 할매를 돌아보며 소달구지에서 내리라고도 했다. 그러면 할매는 내려서 걸었는데, 할매의 걸음걸이가 소의 그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눈만 뜨면, 아침밥만 먹으면, 소달구지를 타고 들에 나가버리는 할배. 그렇게 휭하니 나가버리고 나면 거의 종일을 혼자서 지내는 할매. 혼자서 김을 매고, 혼자서 고추를 따고, 혼자서 쇠죽을 끓이고. 진종일 말 한 마디 붙일 데 없는 할매가 그렇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혼자서 중얼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리지 않겠는가. 할매는 잔소리에 기대어 외롭고 허전하고 고단한 일상을 견뎌내는 것을. 

  할매의 잔소리가 우리 엄마의 잔소리와 너무 흡사해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자주 웃었다. 아버지는 자주 우리에게 ‘제발 너거 엄마 쫌 데불고 가라. 어디 가서 팔아뿌리던지. 내사 마 너거 엄마 잔소리 때문에 지레 말라 죽겄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매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우리 엄마 또한 잔소리로 삶을 견디고 있음을 깨달았다. 할매하고 연세가 비슷한 엄마는 할매와는 달리 이제는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자잘한 집안일까지도. 떡 장사며 보따리 행상부터 남의 집 모내기와 생선 배따기 등,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던 엄마. 요즈음은 아버지가 엄마가 하던 일을 다 하신다.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엄마는 한 움큼씩의 약을 거의 달고 사는데, 엄마가 식사를 하고 삼십 분 정도가 지나면 아버지가 약봉지와 물을 준비해서 엄마 앞에 갖다 주신다. 약을 드시고 나면, 빈 약봉지를 휴지통에 넣고 컵을 치운다. 자상하고 섬세하고 유쾌한 성격이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아버지. 그래도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는 위암 수술을 받고 난 뒤 몸이 좀 회복이 되자 사교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하셨다. 게이트 볼이니 뭐니 하는 것들보다는 춤이 제일 즐겁고 운동이 된단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갓 환갑을 지낸 할머니들과 어울리신다. 
  “오빠, 오빠 나이가 시방 몇이라요?” 
  “내, 얼마 안 돼. 환갑 지낸지 몇 해 됐지.” 
  “그것밖에 안 됐어? 얼굴이 파삭 삭았는데.” 
  “젊어서 못 먹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팔십이 넘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춤 동무인 할머니들의 대화다. 할머니들은 우리 집에 전화해서 ‘오빠 좀 바꿔 주세요.’ 한다. 그러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아버지에게 건네시곤 한다. 아버지는 우리더러 자기 나이를 발설하지 말라고 우리를 볼 때마다 신신당부하신다. 환갑이 다 된 맏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벌건 대낮에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이건 초대형 사기에 속할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엄마에게 괜찮으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엄마는 내사 마 조오타, 하셨다. 늙은이라고 아무도 안 놀아주면 뒷방 짊어지고 눕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젊어서는 그리 잔소리를 해대어도 생전 이도 안 닦고 잘 씻지도 않더니 요새는 낯가죽이 벗겨지도록 너무 씻어 탈이라고. 암수술을 받고도 저리 나날이 재미있다 하니 그보다 다행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딱 한 가지 돈을 너무 많이 쓰고 다닐까봐 그게 걱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매일 저녁 얼마를 썼는지 엄마께 보고 드리라고 건의를 드렸다. 아버지는 그러마고 하셨고,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그걸 지키는지 어떤지는 난 모르겠고, 그것까지는 내 소관도 아니다. 

  한 번은 고향집에 가니, 텔레비전 위에 차량용 방향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차에 두지 않고 왜 여기에다 뒀느냐고 여쭈었더니, 노인 냄새가 날까봐 걱정이 되어서라고 하셨다. 다른 것들은 냄새가 약해서 못 쓰겠더라고. 이게 딱 좋다고. 당신의 후각이 둔해진 탓인 걸 모르시는 것 같았다. 또 한 번은 내게 얼굴의 주름을 없애는 영양크림을 사다 달라고도 하셨다. 나는 웃으며, 스팀다리미로 매끈하게 다리세요, 했다. 또 한 번은 춤출 때 신는다며 백구두를 사오셨다. 우리 자매들이 입을 모아 왕왕거리며 기어이 그 신발을 못 신게 해버렸지만.

  아버지가 춤을 추러 가고 나면, 엄마는 종일을 경로당에서 노신다. 화투도 치고 얘기도 나누고. 엄마는 몸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요즈음이 제일 행복하신 듯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지지리도 가난한 살림에 여덟 자식 굶길까봐 평생을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녔으니.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삶은 누룽지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남긴 고등어의 대가리와 뼈를 엄마는 쪽쪽 빨아먹고 잘근잘근 씹어 먹곤 했다. 어두육미라고 하면서. 그때 우리가 발라먹은 것은 어쩌면 고등어가 아니라 엄마의 서러운 속살이 아니었을까.

  소와 할배는 참 많이 닮았다. 
  오래 붙어 지내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게 되는데, 그게 사람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삼십 년을 더 넘게 붙어 지낸 할배와 소. 그 둘은 얼굴도 닮았고 깡마른 몸피도 닮았고 느리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도 닮았고 끈적거리는 눈물도 눈물 흘리는 눈과 눈매도 닮았다.

  할배는 평생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료 대신에 꼴을 베다가 소에게 먹이는데, 농약을 치면 농작물뿐만 아니라 꼴에도 농약이 배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그만 사료를 먹이자는 할매에게 할아버지는 사료를 먹이면 소가 새끼를 잘 못 밴다고 말한다. 그 말은, 그러한 것들이 결국은 자기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건 할배의 삶의 방식이고 가치관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농작물의 소출이 줄어도, 벌레가 고추를 파먹어도, 묵묵히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는 저 황소고집.

  메뚜기가 벼에 붙어있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생각했다. 침묵을 깨뜨리는 저 소리들. 온갖 자연의 소리들. 조잘대는 새소리, 도랑의 물소리, 장난스런 바람소리, 흔들리는 풀잎소리, 구름 부푸는 소리, 햇살 번지는 소리, 그림자 두꺼워지는 소리, 메뚜기 하품하는 소리, 소리, 소리들. 환경오염문제가,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 중 맨 앞에 놓이는 작금에,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더불어 공생하는 할배의 삶에서 나는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침묵의 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영화가 십여 분 진행되었을 때 영화관을 나가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데이트를 즐기는 미혼의 커플 같았다. 아마 도심에서 태어나 이때껏 도심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리라.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내가 공감하지 못하면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주파수가 맞아야 된다고나 할까. 공감의 정도는 개개인의 경험, 그리고 기억과 연관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표면적으로 본 것은 할배와 할매였다. 하지만 표면에서 한 겹만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내가 본 것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의 이웃들이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이었다. 하나 같이 거무튀튀하게 그을린 얼굴들. 뙤약볕에 버석 바르고 성질 사나운 바닷바람에 주름 밀린 얼굴들.

  그날 내가 본 영화관의 관객 수는 이제껏 내가 본 조조 영화관 중에 제일 많았다. 영화관이 거의 반 정도 찼다. 대개의 경우 평일 조조 영화관은 상영 일수가 상당히 지난 경우 몇 명이 되지 않기 일쑤다. 열 명 내외일 때도 많고, 달랑 나 혼자서 본 적도 여러 번 있다. 상영관이 한정적이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워낭 소리>는 영상이 아름다웠다. 
  내가 우리 집의 산지 10년도 더 된 29인치 텔레비전을 한사코 거부하고 영화관으로 간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보잘 것 없는 시골 농가가 저리 아름답다니. 워낭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투명하게 들리던지. 욕심을 좀 더 내자면, 나는 이 영화를 아이 맥스관에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아니 두 번 세 번 열 번이라도 보고 싶다. 그러면, 75분 동안 나는 햇살 따끔거리는 저 무논에서 메뚜기를 한 주전자 잡아올 텐데. 주전자가 아니면 댓병으로 한 병 잡거나, 풀에 빽빽하게 꿴 걸로 한 열 줄을 잡거나. 어린 시절, 누런 아버지 술 주전자 속에서 발버둥치던 메뚜기들의 몸부림이 찌르르, 타이핑하는 손목에 전해져 온다. 메뚜기의 통통한 허벅지가 알루미륨 주전자에 부딪치던 소리. 얇다란 저희들 날개끼리 서로 부딪치던 소리. 타닥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그만 영화의 잔상에서 빠져나가려는 내 눈 앞에 자꾸만 궁둥이를 들이미는 장면 몇. 
  추석 쇠러 우루루 몰려 온 자식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를 팔자고 하던 모습. 나와 내 형제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게 매우 내게 거슬리면, 거슬리는 바로 그게 내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소가 있으면 우리 모두가 신경이 쓰인다고(?), 신경이 쓰여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하던 며느님.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몇 시간이나 신경을 쓰길래? 난 이런 영화를 볼 때나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나는데. 자식들 마음 편하게 해주자고 덜렁 소를 팔아버리면? 그게 소만 팔아치우는 게 아니라, 소와 더불어 지낸 할배의 인생도 함께 사라져버린다는 걸 왜 모를까? 장면 또 하나. 할배를 향해서였던가? 소를 향해서였던가? 비스듬히 그러나 매섭게 노려보던 할매의 매섭던 눈, 눈매, 눈빛. 할배와 할매를 태운 소달구지를 매단 채 한미 FTA를 반대하며 농성하는 사람들 앞에 멀뚱히 서 있던 소. 주차장에서 번쩍거리는 자가용 옆에 서 있던 소달구지 매단 소. 할배와 할매가 영정 사진을 찍던 모습. 사진을 찍을 때 웃으라며 할배를 자꾸 닦달하던 할매. 젊은 소의 뿔에 자꾸 치받치며 먹이를 먹던 늙은 소. 치받혀 상처 난 부위에 끓던 쉬파리들. 그 쉬파리들을 꼬리를 뒤흔들어 내쫒지도 않고 방치하던 소. 병원에 가느라고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었던 노부부의 모습. 내 청춘을 돌려다오, 혼자 노래 부르던 할매의 모습. 우시장에 매여 있던 늙은 소. 소의 눈망울. 소의 눈물. 할배의 눈물…….

  그런데, 
  옥의 티 한 점. 
  아주 가끔씩 화면이 덜커덩거렸다. 비포장도로에서 덜커덩거리던 소달구지처럼. 뭐랄까. 이음새 같은 게 느껴졌다. 보자, 그게, 너무 매끈하면 더 이상하려나? 일부러 그런 걸까? 

  어쨌거나, 
  <우리 학교>를 보고 싶다. <우리 학교>에, 바닷가 마을에 있는 우리 학교가 나올 것만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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