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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평점 :
천운영의 ‘바늘’을 읽고
아주 작고 사소한 어떤 것이 대단한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이 문학이고 예술이다. 이 작품의 ‘바늘’ 또한 그러한 경우 중의 하나이다. 가정에서 주로 쓰이는, 꿰매는 행위의 도구가 되는 바늘. 얼핏 생각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듯한 사소한 물건이지만, 있어야 할 때에 그것이 없는 경우에 얼마나 당황스럽고 곤란한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제대로 안다.
예컨대 시내 한복판에서 옷의 일부가 튿어진다거나, 산행 중에 정상 부근에서 바지의 허벅지 부근이 땀에 젖어 쫙 찢어버린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나는 실제로 산에서 위에 든 예의 후자의 경우를 당한 적이 있다. 오래 전 일이다. 막 등산을 배우던 시절이라 등산에 적합하지 않은 바지를 입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그날따라 늘 준비해 다니던 휴대용 바느질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의 난감함이란.
이 소설에 나오는 바늘은 일상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다. 문신용 바늘이다. 그리고 문신으로 사람의 몸에 새겨진 바늘의 형상이다. 어느 것이든 의복을 꿰매는 용도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의복을 꿰매거나 수선하는 용도로서의 그것이 의복의 용도에 얹혀 표면적인 어떤 것으로 기능한다면, 문신용 바늘과 몸에 새겨진 형상으로서의 바늘은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육체에 새겨진 글귀는 그걸 새겼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노력’이나 ‘저축’ 같은 글귀가 그렇다. 한번 열심히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살을 파는 아픔을 이겨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역으로 문신에는 앞으로 감수해야 할 삶의 시련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육체와 그 위에 새겨진 글귀 사이에 공존하는 어떤 것.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 혹은 고통스러운 장식이다.”
함께 수업을 듣는 학우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니 집에서도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없었단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이웃에게 맡겨서 목욕탕에 다녀오게 하곤 했단다. 그게 늘 불만이었고 아쉬움이었단다. 그는 다 자라서 대학생이 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는데, 아버지의 온 몸에 흉물스런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어서였단다. 흔히 조직폭력배들이 하고 다니던 그 문신을 몸에 새긴 아버지는 자기로 인해 아들까지 손가락질 받게 될까봐 일부러 그랬단다. 여러 번의 수술로 이제는 그 문신들을 말끔히 지웠고, 함께 목욕도 하게 되었단다.
비단 육체에 새겨진 글귀뿐이겠는가. 순간순간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에도 저러한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가는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고 지워져버릴 만큼 미세한 표정 하나에까지도. 가벼운 농담 하나도 기실은 허투루 내뱉는 경우가 없는 것이 우리 삶이다.
소설의 시작은 남자의 몸에 거미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골리앗거미의 완벽한 대칭을 문신으로 새기는 과정이 찬찬히 그리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대칭에 관한 것은 계속된다. 마지막 문신자로 등장되는 아파트 저 끝 호에 사는 남자. 여자의 아파트와 대칭되는 곳이다. 작가는 이러한 대칭되는 것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대척점에 있는 어떤 것과의 대칭을 이루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을까. 밤과 낮. 여자와 남자. 강함과 연약함. 꼿꼿함과 부드러움. 얼핏 대척점에 있는 그것들은 정 반대의 것처럼 보이지만, 한 겹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그것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엄마는 왜 스님을 죽인 걸까. 자신은 또 왜 죽인 걸까. 이 소설의 곳곳에는 이것처럼 오래도록 행간에 머물며 생각을 하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바늘땀을 뜨듯 아주 정교하고 세세하게 묘사된 행간과 문장들 사이에는 생각해 보아야할 미세한 거품들이 북적대고 있다. 성능 좋은 세탁세제를 적당한 미온수에 넉넉히 풀고 거품이 잘 나는 털옷을 넣어 손으로 주무를 때처럼. 내 추측의 하나는 이렇다. 죽은 스님은 그녀의 생부이다. 문신보다 더 뚜렷한 흔적. 흔적들은 거품과도 같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어 부풀게 한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푼 그 무엇이 죽음을 부르고, 죽음은 마침내 거품을 사라지게 만든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추측을 단어들로 나타내고 보니 이것 또한 때에 절은 상투적인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여백이나 공간이 많아서 이 소설은 재미있다. 해명되지 않은 물음표의 공간이 깊고 넓어 여운이 오래 간다. 여유롭고 한가로운 어느 날 다시 한 번 찬찬히 이 글을 읽어보려 한다. 두툼한 쇠고기를 구워서 하얀 쌀밥과 함께 육즙을 음미해 가며 먹는 그녀처럼 다시 한 번 찬찬히. 그 때쯤이면 내 속의 가장 강한 무기가 무언지, 나의 바늘은 내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기능하는지 알 수 있을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