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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워낭 소리, 침묵을 침묵하게 하는.
벼르고 벼르다 <워낭 소리>를 보러 시내에 있는 영화관엘 갔다. CGV. 사실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성아트홀에서 보낸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메일을 보던 당시에 나는 영화를 보러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정초에 한 치질 수술 때문이었다. 수술 부위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부담이 됐다. 더구나 동성아트홀은 의자 상태가 좀 그렇다. 동성아트홀은 오래전 소극장이었던 것을 시설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의자는 머리 받침대가 없는데다가 등받이도 낮다. 바닥도 푹신하지 않아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자면 성한 몸이라도 온몸이 뒤틀린다.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아무리 보고 싶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수술을 하면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 아직은 너무나 생생한지라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혹시 장기상영이라도 하면 그때 형편을 봐서 가든지 해야지,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서 CGV에서도 상영을 시작했다. CGV의 의자 위에서라면 고난의 행군 뒤인 내 엉덩이도 무사할 것 같았다. 상영시간도 75분밖에 되지 않으니.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면 봐야 할 이유가 떼거리로 몰려드는 법이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자고 맘을 먹으면, CGV에서 영화를 본 이유가 더 있다. 다들 짐작하듯이, 그렇다. 돈 문제다. CGV에서 조조 영화를 보는 데에는 이러저러 할인을 받아서 단돈 천원이면 된다. 그런데 동성아트홀에서는 육천 원이나 든다. 여섯 배나 차이가 나는 금액에 스크린을 포함한 제반 시설이 월등하다면 내 선택은 당연지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문자답한다. 예술영화관의 광팬이라 자처하는 스스로에게 뭔가 그럴싸한 이유를 대야 하겠기 때문이다.
마침 이 글을 쓰기 전에 읽은 대구매일신문에 난 기사 때문에 서두가 길어졌다. 마니아층이 두텁지 않은 예술영화에 눈길도 거의 주지 않다가 흥행이 될 만하자 뒤늦게 상영을 시작한 대구 CGV를 두고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고 했다.
짜잔, 고대하시고 기대하시던 영화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화면에, 자막이 떴다.
허걱! 자국 영화에 자막이라…….
난 경상도 사람이고 둘째 형부가 영주 토박이어서 영화의 주인공인 할배와 할매의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할배와 할매는 연배로 보나 말투로 보나 잔소리하는 습관으로 보나 연판 우리 아버지와 엄마 같았다. 간간이 자막이 저절로 눈에 띄어서 읽었는데, 아무래도 엉성했다. 그들의 정서를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개념이나 의미만 전달하는 듯하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면 나는 어김없이 자막에 기대는데, 그 또한 이와 같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영화보기는 반보기(half see)밖에 되지 않으리라. 그러리란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오늘은 그것에 대해 유난히 더 씁쓸하고 찜찜한 기분이었다. 맨 처음 자막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던 나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막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사람들보다 더 많을 것 같았다. 나 또한 제주도 방언 앞에서는 그럴 것이다.
소의 제를 지내기 위해 청량사 계단을 오르는 노부부.
이어서 나오는 소머리 부분의 그림자.
소의 앞발을 닮은 듯한 노인의 손, 손가락. 손 옆으로는 구릿빛 워낭 하나.
그리고,
신발. 목 부분을 도려낸.
그 신발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세 번 나온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구두가 겹쳐서 떠올랐다. 진중권의 저서 <미학오디세이2>에 적힌 그 <구두>에 대한 글을 옮겨 적는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영화의 신발에는 위에다가 덧붙여야 할 게 더 있다.
할배의 신발에는 장애를 입은 왼쪽다리의 절뚝거림이, 절뚝거리는 다리와 발의 리듬이, 그 리듬과 바람이 함께 뒤섞여 어우러지는 출렁거림이 그득하다. 할배가 그것을 신고 있을 때나 혹 벗어놓았을 때마저도.
할배의 투박한- 투박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투박한- 손과 손가락. 그 손은 바로 내 아버지의 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땜쟁이었다.
아버지의 열 손가락은 함석에 베이고 연장에 스치고 염산이 튀어 갈라지고 트고 거칠었다. 그 손가락들에는 언제나 허연 대일반창고가 둘둘 감겨져 있었고 함석냄새와 맨소래담 냄새가 범벅으로 들끓었다. 아버지는 그 손으로 양동이와 두레박을 만드셨다. 마을의 여인네들이 공동우물에서 새벽마다 그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 아버지는 함석으로 무엇이든 만드셨다. 쓰레받기, 물조리개, 세숫대야. 바케스, 촛대……. 아버지는 그것들을 만들 뿐만 나리라, 그것들에 구멍이 나면 구멍을 때우셨다. 평생을 구멍 때워 식구들 목구멍을 메운 아버지. 늘 구멍을 때우기만 하던 아버지가 딱 한 번 구멍을 뚫은 적이 있었다.
내가 열 살 무렵이었다. 어느 겨울날, 변비가 심했던 나는 요강 위에서 꼴딱 시퍼런 밤을 새웠다. 푸른 목단꽃이 그려진 하얀 사기요강. 밤새도록 요강 위에서 씨름을 하고도 나는 볼일을 보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신 아버지가 건넌방으로 건너오셨다. 거칠거칠한 새끼손가락에 보드라운 비닐을 감고 계셨다. 굵고 투박한 새끼손가락으로 아버지는 내 똥구멍을 파내주셨다. 한겨울,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꽁꽁 언 내 손과 발을 주물러주셨다. 녹이지 않고 바로 아랫목에 넣으면 탈난다, 하고 일러주시며.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8남매를 키우셨다. 영화 속의 할배는 9남매를 길렀다고 했다.
소의 친구인 그 할배는 왼쪽다리가 성치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왼쪽 갈빗대가 두어 개 없다. 군대에서 걸린 결핵의 후유증이다. 할배는 무릎으로 온 논밭을 기어 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함석 처마 밑으로 들이치는 빗줄기처럼 몸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할배의 친구는 소와 라디오였다.
소가 아파서 식욕을 잃으면 여물 대신 할배가 먹는 밥을 먹였다. 할배가 쓰는 것과 같은 그릇에 담긴 쌀밥. 그 그릇에 막걸리도 부어서 먹였다. 그런 소가 1년도 채 더 살지 못할 거라고 수의사가 말했다. 할매의 성화에 할아버지는 소를 타고 우시장에 갔다. 그러나 할배는 애당초 소를 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일백만 원을 겨우 쳐주려는 소를 오백만 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소를 팔려고 집에서 차비를 차릴 때, 소의 눈에서는 끈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소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소의 눈물은 사람의 눈물보다 더 어둡고 더 끈적거렸다. 더 쓰라리고 더 환했다. 소의 언어는 무엇일까? 사람처럼, 소도 제 언어의 감옥에 갇힐까? 모르긴 해도 소의 언어는 능소화 꽃잎보다 더 활활거리고 제비꽃 꽃이파리보다 더 여릴 것 같다. 소는 자기만큼이나 마르고 기운이 없는 저 오랜 친구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할매는 내내 할배에게 있어 소는 업이라고 했다. 나는 도로 할배가 소에게 업으로 보였다.
할매는 입만 떼면 잔소리를 해댔다.
할배는 잔소리에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건 할배가 잔소리를 견디는 방식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할매의 잔소리 또한 고단한 나날을 견디는 방식일 것이고. 할매는 농치듯 말씀을 하시지만, 나는 그런 할매가 무척 외로워보였다. 늘 할매보다 소를 먼저 챙기는 할배에게서 할매는 자주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소가 힘들어하면 할배는 할매를 돌아보며 소달구지에서 내리라고도 했다. 그러면 할매는 내려서 걸었는데, 할매의 걸음걸이가 소의 그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눈만 뜨면, 아침밥만 먹으면, 소달구지를 타고 들에 나가버리는 할배. 그렇게 휭하니 나가버리고 나면 거의 종일을 혼자서 지내는 할매. 혼자서 김을 매고, 혼자서 고추를 따고, 혼자서 쇠죽을 끓이고. 진종일 말 한 마디 붙일 데 없는 할매가 그렇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혼자서 중얼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리지 않겠는가. 할매는 잔소리에 기대어 외롭고 허전하고 고단한 일상을 견뎌내는 것을.
할매의 잔소리가 우리 엄마의 잔소리와 너무 흡사해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자주 웃었다. 아버지는 자주 우리에게 ‘제발 너거 엄마 쫌 데불고 가라. 어디 가서 팔아뿌리던지. 내사 마 너거 엄마 잔소리 때문에 지레 말라 죽겄다.’ 하고 말씀하셨다.
할매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우리 엄마 또한 잔소리로 삶을 견디고 있음을 깨달았다. 할매하고 연세가 비슷한 엄마는 할매와는 달리 이제는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뗐다. 자잘한 집안일까지도. 떡 장사며 보따리 행상부터 남의 집 모내기와 생선 배따기 등,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던 엄마. 요즈음은 아버지가 엄마가 하던 일을 다 하신다.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엄마는 한 움큼씩의 약을 거의 달고 사는데, 엄마가 식사를 하고 삼십 분 정도가 지나면 아버지가 약봉지와 물을 준비해서 엄마 앞에 갖다 주신다. 약을 드시고 나면, 빈 약봉지를 휴지통에 넣고 컵을 치운다. 자상하고 섬세하고 유쾌한 성격이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아버지. 그래도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는 위암 수술을 받고 난 뒤 몸이 좀 회복이 되자 사교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하셨다. 게이트 볼이니 뭐니 하는 것들보다는 춤이 제일 즐겁고 운동이 된단다. 팔십이 넘은 나이에 갓 환갑을 지낸 할머니들과 어울리신다.
“오빠, 오빠 나이가 시방 몇이라요?”
“내, 얼마 안 돼. 환갑 지낸지 몇 해 됐지.”
“그것밖에 안 됐어? 얼굴이 파삭 삭았는데.”
“젊어서 못 먹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팔십이 넘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춤 동무인 할머니들의 대화다. 할머니들은 우리 집에 전화해서 ‘오빠 좀 바꿔 주세요.’ 한다. 그러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아버지에게 건네시곤 한다. 아버지는 우리더러 자기 나이를 발설하지 말라고 우리를 볼 때마다 신신당부하신다. 환갑이 다 된 맏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벌건 대낮에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이건 초대형 사기에 속할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엄마에게 괜찮으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엄마는 내사 마 조오타, 하셨다. 늙은이라고 아무도 안 놀아주면 뒷방 짊어지고 눕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젊어서는 그리 잔소리를 해대어도 생전 이도 안 닦고 잘 씻지도 않더니 요새는 낯가죽이 벗겨지도록 너무 씻어 탈이라고. 암수술을 받고도 저리 나날이 재미있다 하니 그보다 다행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딱 한 가지 돈을 너무 많이 쓰고 다닐까봐 그게 걱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매일 저녁 얼마를 썼는지 엄마께 보고 드리라고 건의를 드렸다. 아버지는 그러마고 하셨고,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그걸 지키는지 어떤지는 난 모르겠고, 그것까지는 내 소관도 아니다.
한 번은 고향집에 가니, 텔레비전 위에 차량용 방향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차에 두지 않고 왜 여기에다 뒀느냐고 여쭈었더니, 노인 냄새가 날까봐 걱정이 되어서라고 하셨다. 다른 것들은 냄새가 약해서 못 쓰겠더라고. 이게 딱 좋다고. 당신의 후각이 둔해진 탓인 걸 모르시는 것 같았다. 또 한 번은 내게 얼굴의 주름을 없애는 영양크림을 사다 달라고도 하셨다. 나는 웃으며, 스팀다리미로 매끈하게 다리세요, 했다. 또 한 번은 춤출 때 신는다며 백구두를 사오셨다. 우리 자매들이 입을 모아 왕왕거리며 기어이 그 신발을 못 신게 해버렸지만.
아버지가 춤을 추러 가고 나면, 엄마는 종일을 경로당에서 노신다. 화투도 치고 얘기도 나누고. 엄마는 몸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요즈음이 제일 행복하신 듯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지지리도 가난한 살림에 여덟 자식 굶길까봐 평생을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녔으니.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삶은 누룽지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남긴 고등어의 대가리와 뼈를 엄마는 쪽쪽 빨아먹고 잘근잘근 씹어 먹곤 했다. 어두육미라고 하면서. 그때 우리가 발라먹은 것은 어쩌면 고등어가 아니라 엄마의 서러운 속살이 아니었을까.
소와 할배는 참 많이 닮았다.
오래 붙어 지내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게 되는데, 그게 사람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삼십 년을 더 넘게 붙어 지낸 할배와 소. 그 둘은 얼굴도 닮았고 깡마른 몸피도 닮았고 느리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도 닮았고 끈적거리는 눈물도 눈물 흘리는 눈과 눈매도 닮았다.
할배는 평생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료 대신에 꼴을 베다가 소에게 먹이는데, 농약을 치면 농작물뿐만 아니라 꼴에도 농약이 배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그만 사료를 먹이자는 할매에게 할아버지는 사료를 먹이면 소가 새끼를 잘 못 밴다고 말한다. 그 말은, 그러한 것들이 결국은 자기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건 할배의 삶의 방식이고 가치관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농작물의 소출이 줄어도, 벌레가 고추를 파먹어도, 묵묵히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는 저 황소고집.
메뚜기가 벼에 붙어있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생각했다. 침묵을 깨뜨리는 저 소리들. 온갖 자연의 소리들. 조잘대는 새소리, 도랑의 물소리, 장난스런 바람소리, 흔들리는 풀잎소리, 구름 부푸는 소리, 햇살 번지는 소리, 그림자 두꺼워지는 소리, 메뚜기 하품하는 소리, 소리, 소리들. 환경오염문제가,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 중 맨 앞에 놓이는 작금에,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더불어 공생하는 할배의 삶에서 나는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침묵의 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영화가 십여 분 진행되었을 때 영화관을 나가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데이트를 즐기는 미혼의 커플 같았다. 아마 도심에서 태어나 이때껏 도심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리라.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내가 공감하지 못하면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주파수가 맞아야 된다고나 할까. 공감의 정도는 개개인의 경험, 그리고 기억과 연관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표면적으로 본 것은 할배와 할매였다. 하지만 표면에서 한 겹만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내가 본 것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의 이웃들이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이었다. 하나 같이 거무튀튀하게 그을린 얼굴들. 뙤약볕에 버석 바르고 성질 사나운 바닷바람에 주름 밀린 얼굴들.
그날 내가 본 영화관의 관객 수는 이제껏 내가 본 조조 영화관 중에 제일 많았다. 영화관이 거의 반 정도 찼다. 대개의 경우 평일 조조 영화관은 상영 일수가 상당히 지난 경우 몇 명이 되지 않기 일쑤다. 열 명 내외일 때도 많고, 달랑 나 혼자서 본 적도 여러 번 있다. 상영관이 한정적이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워낭 소리>는 영상이 아름다웠다.
내가 우리 집의 산지 10년도 더 된 29인치 텔레비전을 한사코 거부하고 영화관으로 간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보잘 것 없는 시골 농가가 저리 아름답다니. 워낭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투명하게 들리던지. 욕심을 좀 더 내자면, 나는 이 영화를 아이 맥스관에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아니 두 번 세 번 열 번이라도 보고 싶다. 그러면, 75분 동안 나는 햇살 따끔거리는 저 무논에서 메뚜기를 한 주전자 잡아올 텐데. 주전자가 아니면 댓병으로 한 병 잡거나, 풀에 빽빽하게 꿴 걸로 한 열 줄을 잡거나. 어린 시절, 누런 아버지 술 주전자 속에서 발버둥치던 메뚜기들의 몸부림이 찌르르, 타이핑하는 손목에 전해져 온다. 메뚜기의 통통한 허벅지가 알루미륨 주전자에 부딪치던 소리. 얇다란 저희들 날개끼리 서로 부딪치던 소리. 타닥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그만 영화의 잔상에서 빠져나가려는 내 눈 앞에 자꾸만 궁둥이를 들이미는 장면 몇.
추석 쇠러 우루루 몰려 온 자식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를 팔자고 하던 모습. 나와 내 형제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게 매우 내게 거슬리면, 거슬리는 바로 그게 내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소가 있으면 우리 모두가 신경이 쓰인다고(?), 신경이 쓰여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하던 며느님.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몇 시간이나 신경을 쓰길래? 난 이런 영화를 볼 때나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나는데. 자식들 마음 편하게 해주자고 덜렁 소를 팔아버리면? 그게 소만 팔아치우는 게 아니라, 소와 더불어 지낸 할배의 인생도 함께 사라져버린다는 걸 왜 모를까? 장면 또 하나. 할배를 향해서였던가? 소를 향해서였던가? 비스듬히 그러나 매섭게 노려보던 할매의 매섭던 눈, 눈매, 눈빛. 할배와 할매를 태운 소달구지를 매단 채 한미 FTA를 반대하며 농성하는 사람들 앞에 멀뚱히 서 있던 소. 주차장에서 번쩍거리는 자가용 옆에 서 있던 소달구지 매단 소. 할배와 할매가 영정 사진을 찍던 모습. 사진을 찍을 때 웃으라며 할배를 자꾸 닦달하던 할매. 젊은 소의 뿔에 자꾸 치받치며 먹이를 먹던 늙은 소. 치받혀 상처 난 부위에 끓던 쉬파리들. 그 쉬파리들을 꼬리를 뒤흔들어 내쫒지도 않고 방치하던 소. 병원에 가느라고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었던 노부부의 모습. 내 청춘을 돌려다오, 혼자 노래 부르던 할매의 모습. 우시장에 매여 있던 늙은 소. 소의 눈망울. 소의 눈물. 할배의 눈물…….
그런데,
옥의 티 한 점.
아주 가끔씩 화면이 덜커덩거렸다. 비포장도로에서 덜커덩거리던 소달구지처럼. 뭐랄까. 이음새 같은 게 느껴졌다. 보자, 그게, 너무 매끈하면 더 이상하려나? 일부러 그런 걸까?
어쨌거나,
<우리 학교>를 보고 싶다. <우리 학교>에, 바닷가 마을에 있는 우리 학교가 나올 것만 같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