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13 : 중국 1 근대 편 -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수립 먼나라 이웃나라 13
이원복 지음, 그림떼 그림 / 김영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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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거쳐 이웃나라로 돌아왔다 

『먼나라 이웃나라13-중국1』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0

최근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제적 위상과 자신감이 몰라보게 달라졌는지 중국 중심의 사고와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한국은 스스로를 동북아 국가로 본다. 일본은 스스로 동아시아 국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아시아 국가라고 하겠다.” 또 중국 전체 수출액 중 한국 비중은 4.5%에 불과하며 중국 31개 성시 중 하나인 광동성의 소득이 조만간 한국 전체를 제칠 수도 있다고 큰소리치는 나라가 중국이다. 한국이 보는 중국과 중국이 보는 한국은 이처럼 다르다. 한때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난 글이 떠돈적이 있다. ‘1949년(중국 성립)에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1979년(개혁개방 시작)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으나, 1989년(텐안먼 사태)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고, 2009년(금융위기)에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신(新)중국을 탄생시킨 사회주의 혁명서부터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60년을 돌아보며 나름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말 세계 수도의 지위가 뉴욕에서 베이징・상하이로 이동하며, 국제 무역 시장에서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거래하는 날이 조만간 올지 모른다. 우리는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이라는 덩치 큰 4대 열강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이다. 세계패권을 위해 부활하는 중국의 눈에 이웃나라인 한국의 존재가 자칫 작아지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럴때일수록 중국을 제대로 보고 공존의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고,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공부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던 참에 맞춤한 책이 눈에 띄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만화였다.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전국의 집집마다 적어도 한 권씩, 학교 도서관마다 한 질씩은 가지고 있을 만큼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국민 교양 만화다. 지난 1981년부터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유럽 6개국 편이 사실상 시작이라고 보면 작업에만 29년이 걸린 셈이다. 당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국내 독자들을 전세계 역사・문화에 눈 뜨게 만든 최초의 대중 교양서 역할을 했으며, 1987년 첫 출간 후 세계 시민의 마인드를 제시하며 글로벌 시대를 열어준 국민 교양 만화로 평가받고 있다. 당초 저자는 '미국 편'을 끝으로 이 시리즈를 접으려고 마음먹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중국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늘 허전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감히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거대하고 뿌리 깊은 나무였기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중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역학 변화 속에서 끊이지 않는 독자들의 '중국 편' 출간 요구를 받아 고심끝에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로 나온 책이 화려하고 장대한 역사 뒤에 감춰진 중국의 재탄생 과정을 쉽고 자세하게 그려낸 <먼나라 이웃나라> 13권『중국1-근대편』이다. 

‘중국’의 역사는 기원전 221년 진나라 시황제부터 시작된다. 이집트, 로마, 몽골, 오스만트루크 제국 등 지구상 모든 제국이 사라졌어도 현재까지 꿋꿋이 버티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 130여 년의 태평성대를 보내며 지속된 안정과 평화는 중국이 몰락하는 큰 원인이 되었으며, 정치・경제 혁명을 통해 발전을 거듭한 유럽에게 추월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화사상으로 천하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동양의 제국이 서구 열강의 강탈과 수모를 겪으며 약체 국가로 추락하면서 중국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중국은 어떻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00년 만에 세계 최강국으로 부활을 이뤄냈을까? 중국편 첫 권은 17~18세기 태평성대를 누리며 세계 최강 제국이었던 청나라가 19세기 유럽 제국들의 침략을 받고, 오랑캐로 여기던 일본의 지배와 남북 군벌의 대립을 겪으며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이후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학생·노동자들의 봉기로 공화국의 싹이 트는 과정도 보여준다. 이렇듯 중국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내부의 분열에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기나긴 수난과 침탈에 안팎으로 맞서 싸우며 변화해 왔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일 전쟁, 신해혁명, 5・4운동 등 세계사시간에 한번쯤 들어봤을 사건들이 글과 그림으로 어우러져 단번에 꿰어진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중국과, 중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기 개혁을 시작한다. ‘중체서용’ 사상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서양의 앞선 기술만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려던 중국의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데 비해, 탈아입구・화혼양재 이념으로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스스로 부정하고 근본부터 서양식으로 바꾼 일본은 급속한 발전을 거쳐 서구 열강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이는 중국이 과거 오랑캐로 여기던 일본에게 지배를 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외세의 침략 앞에서 스스로를 바꾸려는 자기 개혁의 몸부림이 어찌하여 일본은 성공하고 중국은 실패하였는가?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을 꿈꾸며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왜 이제 비틀거리며, 폄하되고 멸시받던 중국은 세계 최강국을 향한 웅비를 거듭하는가? 저자는 특유의 탁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이 질문의 해답을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찾아 풀어낸다. “중국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혼란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으며 서구열강과 일본에 침략과 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은 끝내 중화사상을 버리지 않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왔으며 동양인・아시아인의 정체성을 지켰고 문화 정체성을 확고히 유지해왔기에 역설적으로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에 뚜렷한 문화 정체성이 성장의 정신적 동력이 되어 세계 제일의 대국을 향한 무서운 비상을 거듭하고 있다.(89쪽)” 책은 그밖에도 아편 전쟁이 중화사상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청・일, 러・일 전쟁은 청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의화단 운동은 어떻게 일어났는지, 군벌 정부의 몰락과 중화민국의 성립과정 등을 한눈에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특히 중국 국내상황 뿐만 아니라 중국의 같은 시대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시대상황까지 곁들인 설명 덕분에, 역사책 몇 권 을 함께 펼쳐놓고 각 나라끼리 비교하며 읽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중국 문명을 평가하는데 인색한 서양 학자들조차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중국의 경제력과 문화수준은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고 인정한다. 우리에게도 중국은 경외의 눈을 가지고 쳐다보던 문화대국이었다. 청나라 시대 수도 베이징은 세계의 지식에서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모든 학문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는 문명의 백화점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단에 합류하길 가슴 설레며 소원했다. 최근 몇 년동안 출장이나 여행으로 북경・상해・서안・돈황 등 중국 곳곳을 다녀본 개인적 경험이나, 한 독서모임에서 ‘중국 전통사회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중국 최고의 명작소설 <홍루몽>을 윤독하면서 받은 느낌도 비슷했다.

중국의 본질과 중국인의 내면을 정교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중국의 근・현대사를 모르고 중국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현실을 읽고 내일을 유추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은 문자 텍스트 뿐만 아니고 그림 한 컷 한 컷을 통해 보고 넘기는 만화책이 아닌 읽고 곱씹는 역사책으로서의 역할을 독특히 해내고 있다. 유익함은 물론이고 덤으로 흥미와 재미까지 안겨 주기에 자녀들에게 주는 선물로도 적당하다. 뿐만 아니라 국민 교양 만화라는 명성에 걸맞게 성인들의 서재에 꽂혀 있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책이다. 먼나라를 거쳐 이제야 이웃 나라로 돌아온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 근대편에 이어서 나올 현대편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끝-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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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도 - 윤석철 교수 제4의 10년 주기 작作
윤석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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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이 개인과 기업을 구한다 
 

『삶의 정도』
윤석철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0

"지난 2010년 8월 칠레 산호세 광산이 붕괴했을 때, 칠레 정부는 매몰된 광부들을 크리스마스에나 구출할 수 있을 것같다고 했고, 이것은 광부들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구출시간 최소화'를 목적함수로 하였고, 목적함수 달성을 위한 수단매체로서 드릴 공법만이 아닌 망치 공법이 채택되었다. 그 결과 구출시간이 두 달 이상 단축되었고 매몰 광부 모두가 구출되었다. 코스트 절감 같은 복잡한 문제는 제거되고, '단순화'된 목적함수와 그에 필요한 수단매체라는 이진법적 구조로 문제가 간결화되면서 인명구조에 성공한 것이다." 

윤석철 한양대 석좌교수는 『삶의 정도』에서 '복잡함(complexity)'을 떠나 '간결함(simplicity)'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이 복잡해지고, 욕망과 가치관도 복잡해진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엔트로피, 즉 무질서가 증가하는 것이다. 현상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해법을 찾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복잡한 것은 자기 스스로의 복잡함에 얽매여 힘이 없다. 복잡한 것은 단순화 쪽으로 진화해야 살아 남는다. 기업도 조직이 복잡해지면서 경영 이념과 목표가 혼란에 빠지고, 의사결정의 기준도 모호해지고 의사결정의 속도도 느려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덜 중요한 것은 버려 문제를 간결하게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수단매체'와 '목적함수'라는 2개의 개념으로 인간 삶의 세계를 분석하며, 이것으로 삶에 필요한 모든 의사결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목적함수란 인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방향이며, 수단매체란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적 도구이다. '칠레 산호세 광산 광부 구출사건'은 간결화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한국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저자는 서울대 독문과에서 물리학과로 전과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들며 양 분야를 아우르는 독특한 학문 역정으로 유명하다. '한국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윤석철 교수가 여러 방면의 공부를 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독일의 경제발전 모델을 배우고 싶어 독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 발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물리학과 전기공학을 공부했다. 또 미국 유학 시절 만난 한국 기업인들로부터 '경영학을 공부해 기업을 도와달라'는 말을 자주 들은 것이 경영학으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의 책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학문적 너비와 깊이를 느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기인한다. 이 책은 <경영학적 사고의 틀>(1981), <프린시피아 매네지먼트>(1991), <경영학의 진리체계>(2001)에 이어 10년 주기로 펴내는 저서의 네 번째 산물로 저자의 학문 세계와 철학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한 자동차 회사가 수은공해의 위험성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텔레비전 방영 직전, 이 회사는 사내에서 시사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중대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다큐멘터리 방영 1시간 동안 '수은'이라는 단어, 즉 '머큐리(mercury)'가 수백 번 음성으로 나가는데, 이는 이 회사의 경쟁사 자동차 모델 '머큐리(Mercury)'를 수천만 소비자들의 귀에 심어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와 제작비가 들어간 다큐멘터리는 폐기되었으며, 일반 국민들은 수은의 위험에 대해 알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경쟁 속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의 단적인 케이스다. (158쪽)

수단매체가 아무리 좋아도 목적함수 없이는 소용없다. 저자는 먼저 의미있는 목적함수를 설정하라고 조언한다. 유한한 자원을 살아가는 생명체인 인간은 자원과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코스트 최소화(minimization of cost)’를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함수로 삼아야 한다. 코스트 최소화 목적함수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목적함수를 들자면 이익 최대화(maximization of profit)이다. 경제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는 사회의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가 그림자 코스트(shadow cost)를 유발하고, 이것이 고용 축소의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익 최대화 목적함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 생존부등식 이론을 탐구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생존부등식은 가치(V)>가격(P)>원가(C)로 표시할 수 있다. '소비자가 느끼는 제품의 가치가 가격보다 크고, 또 가격은 생산자가 부담하는 원가보다 커야 한다'는 논리다. 소비자는 가치에서 가격을 뺀 만큼을 순가치로 얻고, 생산자는 가격에서 원가를 뺀 만큼의 순이익을 얻을 수 있다. 즉 가격 이상의 가치를 주는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 수단매체와 목적함수를 결합하는 생존부등식의 충족요건으로 감수성과 상상력ㆍ탐색시행을 꼽고 있다. 특히 한국적 풍토에서 혁신적인 기업가정신과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을 가장 많이 따는 나라는 한국이다. 하지만 올림픽 성화 점화에 가장 먼저 불화살을 이용한 나라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불화살을 이용한 성화 점화라는 참신한 방법을 이용하여 세계인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만약 불화살 점화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했다면 우리나라가 양궁의 강대국임을 과시하는 한편, 우리가 생산한 정밀 조립제품의 품질을 선전하는 계기도 마련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활을 잘 쏘면서도 활을 쏘아 성화에 불을 붙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와 토양, 그리고 실패할 수 있는 여유가 숨 쉬는 조직 분위기가 상상력 부족으로 나타난 탓이다.” (225∼226쪽)

학문의 진정한 가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다. 문제의 구조가 복잡해지고 상호 연결이 심오해진 오늘날에는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방법만 갖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여러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 해답을 찾는 통섭(統攝)의 방법론이 필요한 시대다. 수 많은 사례와 사진ㆍ그림ㆍ도표를 동원하여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단순하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복잡함을 떠나 간결함을 추구하라'는 것과 '이익을 가치 위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보다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는 노학자의 충고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때다. -끝- (기획회의 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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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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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너는 누구냐? 

『자본주의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L. 하일브로너・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2010

경제 입문서는 흔하다. 그중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경제라는 거대한 산맥을 주마간산 식으로 대충 훑고는 경제를 다 말했다고 하는 책들도 있다. 하도 사람들이 경제 경제 하니 나도 한번 ‘경제’를 이해해보겠다고 이런 책을 펼쳤다가 던져버린 사람들도 많을듯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원제: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는 체급부터 다르다. 뛰어난 경제사상 입문서로 꼽히는 <세속의 철학자들>로 이미 필명을 알린 미국의 경제사상가이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경제사학자인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이 책의 저자다.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책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저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1962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발맞추어 40년 이상의 시간을 넘기며 개정과 보증을 거친, 경제사에 있어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12번째 개정판인 이 책은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정보 기반 사회 등도 새롭게 조명했다. 저자는 이른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도 줄곧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이론이든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경제생활과 유리된 이론이나 법칙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경제학자’ 대신에 ‘경제 사회학자’로 자처한 그는 경제현상을 전체 사회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역사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그가 2005년에 숨졌을 때 여러 부음은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란 칭호를 헌사했다.

공저자인 뉴스쿨 경제학과의 윌리엄 밀버그 교수는 이 책의 서론에서 로버트 하일브로너 교수가 경제학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밝혀 놓았다. “경제학의 목적은 경제생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물질적 조달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풀기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에 있어서 독특한 단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고유한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다른 사회적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계속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일브로너는 강조했다. “경제적 충동과 경제적 제도들에서 역사의 모든 원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그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일 정치적 의지와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핵심은 경제적 힘들만으로 사회적 변화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려면 경제가 묻어 들어 있는 사회적 도덕적 맥락을 의식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류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견해가 일치하는 것이 하나 있다. ‘경제’라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의 운동법칙을 내장한 채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불변의 내재적 법칙을 가진 완성된 체제로 보는 셈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희소성 원리, 생산·효용 함수 등을 근거로 내세우며 초역사적인 경제법칙을 말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임노동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모든 지점을 ‘자본주의’로 규정해, 역시 초역사적인 경제법칙을 발견해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대로 그간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자기 조정 메커니즘을 갖고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발전돼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대 경제사를 들여다보면 시장경제가 완결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다. 특히 2008년 지구촌을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심과 성찰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우선 인류가 생산과 분배 즉, 경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왔는가를 통사적으로 짚어가며 시대 변화의 모습을 꼼꼼하게 그려낼 뿐 아니라 시대마다 변화의 동력이 무엇이었나를 살핀다. 인류 역사 속에 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간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존재해온 유형을 크게 전통, 명령, 시장이라는 세 가지로 제시한다. 인류는 이 세 가지 방법 혹은 이들의 조합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즉 자본주의의 발흥에 대해 “전통과 명령에 복속되어 있던 경제적 장치들이 각종 제약에서 풀려나 시장의 자극과 지도를 받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나 도덕, 기술 변화 등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진화해와,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회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탄력적인 것이 됐다”고 말한다. 또 이 책은 시장 이전의 경제, 중세사회에서의 자본주의 기원, 산업혁명, 대공황, 자본주의의 황금시대, 지구화와 정보기반 사회 등 자본주의 역사의 굵직한 경제 주제를 다루면서 자본주의가 여러 개의 상충되는 이념들로 구성되며 끊임없이 진화해왔음을 설명한다. 지난 역사에서 물질적 조달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풀기 위해 인류가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와 이를 어떻게 맞서며 유동적으로 변모시켜 왔는지를 서술한다. 시장 체제 혹은 근대 자본주의가 얼마나 독특한 체제이며 이렇게 독특한 체제가 발전하는 과정은 또 얼마나 엄청난 규모의 전 사회적 역동성과 맞물려 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경제사 산책’류의 범속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경제 체제가 어떻게 발생했고 또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수식과 통계 위주인 주류 경제학의 따분한 서술 방식 대신, 저자 특유의 ‘글발’ 넘치는 경제학 언어를 동원하여 스토리 위주로 흥미롭게 풀어쓴 일종의 역사-경제-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나온 인문사회 책 중 화제작이었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번역했다. 쉽고 간결한 번역과 한국 경제상황까지 반영한 친절한 각주도 돋보인다. 번역자의 말처럼 단순히 자본주의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굳이 이 책을 보지 말고 잘 정형화된 기존의 경제사 책들을 보는 게 나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 변화의 큰 ‘궤적’을 그려보고 싶고,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딱이다. 580쪽에 달하는 책을 덮을때 쯤이면 훌륭한 석학에게 한 학기 동안 강의를 들은 것처럼 충만감이 가득찰 것이다. 특히 지난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요즘 같은 때 ‘지식의 십전대보탕’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든든해지는 책이다. -끝- 

* 기획회의 289호 기고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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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김재영 지음 / 더팩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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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신화의 덫에 걸린 사람들 

『하우스푸어』
김재영 지음, 더팩트, 2010

‘워킹 푸어(Working Poor, 일 하는데 가난한 사람)’라는 말을 들은게 엊그제인데, 이젠 또 ‘하우스 푸어(House Poor)’란다. 하우스 푸어는 비싼 집에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는 신조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우리시대 우리나라 국민들만큼 집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내집 한칸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던 사람들. 지상의 방 한 칸, 지상의 집 한 채. 더도 바라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겨우겨우 ‘내집’을 가졌으나, 이젠 그 집에 짓눌려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니. 아빠는 하우스 푸어, 아들은 이른바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그냥 ‘푸어’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 책을 쓴 이는 현직 방송사 프로듀서다. 당시 MBC <PD수첩>의 프로듀서였였던 저자는 방송을 통해 최근 1년 동안 부동산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 보도했다. 판교와 강남 재건축, 인천 송도에 이르기까지 재건축 문제 등 아파트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자화상이 전파를 타고 안방에 전해졌다. 아파트 신화의 덫에 걸려 비싼 집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가감없이 전해졌다. 이들은 2000년대 수도권 아파트 가격 폭등기를 지나오면서 아파트 불패신화에 속아 무리한 대출로 재건축 단지, 뉴타운, 신도시 등에서 아파트를 구입했지만, 집값이 떨어지면서 부채를 제때 갚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무리하게 집을 사지 않았다면, 저축을 하며 충분히 중산층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이 집 없는 중산층에서 집 가진 하류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에게 집은 더 이상 돈덩이가 아닌 빚덩어리일 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족쇄가 되어 버렸다. 넓은 범위지만, 빚을 내서 집을 산 사람들이 100만 가구에 육박한다고 한다. 포스트 버블 시대에 한국경제에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화두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탐욕에 가득찬 몇몇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우스 푸어가 양산되는 이유는 일반 가계의 단순한 판단 착오 때문이거나 탐욕 탓으로 돌려버리기에는 매우 구조적인 근원을 갖고 있다. 정부-금융기관-건설업체-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달콤한 환상과 사탕발림으로 그들을 꼬드기며 부동산 덫이라는 거대한 매트릭스를 만든 것이다. 언론까지 나서서 부동산 불패와 강남 불패를 대놓고 나불댔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미친 광고까지 거들며 부동산을 통한 대박환상과 인생역전을 부추겼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판이 너무 커졌다. 영악한 자들은 진작 낌새를 차리고 판을 떠났는데, 정작 폭탄은 뒤늦게 판돈을 건 힘없는 사람들이 맞았다. 살짝 까본 패만 보고 없는 돈까지 끌어 모아 올인을 했더니, 돌아오는 건 빚 독촉에 월급 자동 차압이다. 

이 책은 취재를 통해 숨겨져 있던 많은 사실과 진실들을 알게 해준다. 억울하고 기막힌 사람들의 증언과 전문가 인터뷰도 잇달아 나온다. 이중에서 눈길을 확 끄는것은 집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건전한 중산층인 박준명 씨(가명)의 예다. 부부 연봉이 1억원이 넘지만, 그는 여전히 전세를 살고 있다. 집에 투자하는 대신 부부와 세 자녀가 여행을 다니고, 자녀들은 다양한 교육을 체험하고 있으며, 노후 자금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지금은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박 씨는 고점 대비 20% 이상 집값이 떨어졌는데도 집을 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 하나를 포기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행복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192-197쪽)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 혹은 집이라는 존재는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거주를 위한 집’은, 어느새 ‘투기를 위한 집’으로 변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왜 아무것도 아닌 콘크리트 건물에 이렇게 인생을 허비해야 하는거지?’ 이 책은 아파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돌이켜보라고 말한다. 하우스 푸어의 세계가 혹 자신의 세계는 아닌지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이 책은 신문에는 나오지 않는 부동산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작 알았으며 좋았을걸 하고 뒤늦게 땅을 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불편한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끝-(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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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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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너머로 흔들리는 부성의 부재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0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아버지는 작년 9월에 이감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뇌물죄로 구속된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져 민통선 안쪽의 최전방에 위치한 수목원으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1년을 머물며 식물과 나무들의 세밀화를 그리는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어느날 인근 군부대로부터 한국전쟁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을 세밀화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세밀화가인 주인공 조연주와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구속됐던 비리 공무원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거리감을 두려고 하는 어머니가 한 켠에 있고, 통문소대장 김민수 중위와 수목원 연구실장 안요한 등이 다른 한 켠의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다. 

김훈의 이전 작품들은 대개 이 세상의 비루함과 몸을 섞어야 했던 남성들이 단골 소재였다. 삶과 죽음이 칼날처럼 맞부딪치는 쓸쓸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거나, 깊고 핍진한 상실감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주로 남성들)의 내면을 즐겨 그렸다. 이번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처럼 굵직한 역사소설이 아니고, 29살 여성 화자를 중심에 둔 현대물을 선 보였다. 생명이 돋아나는 숲의 아름다움과 세월에 마모된 유골의 황폐함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통의 싹을 틔우는 세밀한 과정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아버지의 세상과 주인공의 생활이 맞닿는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담아낸 숲의 묘사와 함께 신산한 살풍경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에는 일관된 스토리나 서사구조가 약하고 문체 역시 건조하다. 감정이입이 없고 문장과 문장 사이가 넓어, 든든한 골격(사실) 보다는 섬세한 피부(묘사)에 의지해서 읽어야 한다. (물론 김훈의 팬이라면 이정도의 불친절함은 이미 익숙하겠지만 말이다) 대신, 김훈 소설 특유의 비루한 삶이나, 그 삶에서 묻어나는 파편 같은 것을 끌어모은 풍경이, 삶을 견디는 것은 저렇게 힘들고 쓸쓸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부성의 부재, 즉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뇌물을 챙기고 상납하다가 구속된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구속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의 삶에서 떨어져 나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역시 남편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 교회라는 품속으로 맹목적으로 숨어 든다. 물론 아버지의 뇌물수수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범죄행위가 분명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뇌물을 받다 구속당한 아버지는 가족에게서 버림받는다. 

"지금 아버지가 앉아 있는 집은 아버지가 거처할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른 아파트로 보낼 것이었다. (- - -) 아버지에게 교도소 안과 교도소 밖은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리는 없었다." (183쪽)

아버지 자리가 없다는 말은 '정자 기증자'이며 '경제적인 기부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꿈을 꿀때면 늘 함께 나타나는 '좆내논'이라고 불리는 말의 은유 속에서 쓸모를 다한 무기력한 폐마(廢馬)와 하나로 겹쳐진다. 주인공은 뼈그림을 그리며 간간이 아버지의 무기력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비루하고 남루한 삶 역시 자신이 그리는 뼈그림을 닮아 처연하고 서늘하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 인간, 또는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 - -)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삶은 멸종의 위기에서 허덕거리듯이 위태로웠고, 비굴했다. (- -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리라는 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9쪽)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부재 현상은 따지고 보면 산업화의 결과다.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공장이나 광산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집에서 더는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버지라는 종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 너무나 슬프고 딱한 소설이다.

"산업화는 낮에는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빨아들였다가 밤에는 작업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동숙소로 이들을 뱉어내었다. 가족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중에서)

아버지와 헤어지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함께 사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살던 어머니는 막상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긴 울음을 토해낸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뼛가루를 수목원이 있는 자등령 숲속에 산골(散骨)하여 장례를 치룬 후 수목원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향한다. 

"어머니는 뒹굴면서 울었다. 어머니의 몸속에 저토록 모진 울음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울음은 한 번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고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울음이었다. (- - -)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이 너무 멀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329쪽)

이 소설을 연애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훈의 연애 서사에는 "사랑한다"는 고백도 없고, 하다못해 끌어 안거나 입맞춤 하는 장면조차도 찾아 볼수가 없다. 다만 이 소설의 밑바닥에 흐르는 약간의 온기와, 어쩌면 막 스며들기 시작한 사랑의 무늬가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안실장의 어린 아들 신우를 한 번 안아 주고 싶다는 주인공의 마음속 생각이나, 제대를 앞둔 김중위가 주인공에게 미리 명함을 건네고, 그 명함을 잘 갖고 있는지 여러번 확인하며 다음에 만날 가능성이 여운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그렇다. 작가가 언젠가 다른 책에서 썼듯이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 아마도 주인공은 어린 신우나 김중위한테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갈구한다”고 밝힌 작가의 말처럼 다음에 만날 작품에서는 더 온전한 사랑과 희망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지난 주말에 아이를 학원에 밀어넣고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이 소설을 읽었다. 창밖으로 세설(細雪)이 흩날리고 있었다. 자등령 숲 속 너머에서 낯선 나무들이 뿜어내는 날선 풍경의 파편들이 이 도시로 묻어 온 듯 미세한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삶은 순간의 음역을 살며 가슴 저미도록 짧다. 절망이 섞여있지 않은 희망이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비겁한 모습일까 하는 생각에 부르르 몸서리가 난다. 때마침 유재석 나오는 ‘무한도전’ 할 시간이라며 귀가를 재촉하는 아이의 문자메시지가 뜬다. 나는 집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나는 다시 아버지가 된다. -끝-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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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0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 리뷰 스타일 참 좋아합니다.
어쩜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깊은 글을 쓸 수 있는지.....
책을 읽는다, 생각을 한다, 쓴다.
전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열심히 읽고 노력해야 겠습니다.
글 스타일 비슷해져도 노여워 하지 마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