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감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달콤할 수도 씁쓸할 수도 아플 수도 있지만 공통적인 것도 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에 관계없이. 처음 <침묵의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선 좀 당황했었다. 요새 읽었던 책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무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작가의 역량을 확인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되었다. 짧은 이야기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려면 이야기꾼 기질을 한껏 발휘해야하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야 말하지만 책은 쉽게 읽힌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여정이었다. “우리는 눈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누군가의 추모식. 13학년에 재학 중인 크리스티안은 강당에서 영정사진에서 친숙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슈텔라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다. 책은 추모식과 과거의 크리스티안, 슈텔라 선생님의 이야기가 교차하여 진행된다. 그들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셈이다. 해변에서 채석 일을 하는(독일 학제는 1년이 더 길기 때문에 13학년은 성인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크리스티안과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인 슈텔라. 그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크리스티안의 관점에서만 책이 진행되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선 조금 불친절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둘은 소위 선생과 제자 커플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선생과 제자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해 받기 힘든 일인데 그래서인지 둘의 사랑은 은밀하게 진행된다. 부모님도 같은 반 친구들도 모르게. 하지만 처음부터 나왔듯이 스텔라의 죽음으로 둘의 사이는 예정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그저 과정에서 크리스티안이 바라본 스텔라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그토록 정열적으로, 사랑에 빠진 십대의 눈에 비친 스텔라는 온화한 미소를 지니고 우아한 몸짓을 하고 빼어난 수영 실력과 지성까지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여인이다. 앞서 말했듯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충분한 이야기가 없어서 감정이입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예전 추억들을 불러일으켰다고 할까. 아무 계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스텔라를 좋아하는 크리스티안은 내가 지나왔던 옛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말미에 스텔라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상실의 아픔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크리스티안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노천카페에서는 벌써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업원들이 음료수와 음식을 식탁으로 바쁘게 나르고 있었다. P. 150 책 뒤편에 역자 후기를 보고나서야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영원성이라는 걸 알았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들이 서로 나눴던 감정들과 시간들은 영원 속에 간직된다는 것이다. 뜬금없지만 후기를 읽고 얼마 전에 종영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떠올랐다. 멈춰 버린 그들만의 시간, 뭔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책은 감성적이었지만 드라마는 음산했다는 것? 요 근래에 스릴러 소설만 줄곧 읽어댔었다. 오랜만에 읽은 사랑이야기는 처음에 조금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내 감성도 약간이나마 촉촉해졌겠지. 문득 궁금한 점은 스텔라의 동료선생인 쿠글러가 왜 추모식에서 “스텔라 왜,왜,왜 그래야 했어” “다른 방법은 정말 없었던 거야?” 라고 말했냐는 것이다.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