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관계 대산세계문학총서 68
쇼데를로 드 라클로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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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서 영화화 된 원작 소설 [위험한 관계]를 꼭 읽어 보고 싶었던

참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 서점에 들렸다가 문학 전집 코너에 다소곳이(?) 꽂혀 있는 이 놈(?)을 보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욕망과 위선의 추악한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남녀간의 사랑과 배신, 질투와 복수로 점철된175편의 편지를 쉼없이 읽는 것은 대단히 피곤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타인의 비밀을 공유하고 욕망을 훔쳐보는 일이 처음에는 가슴 설레이고 짜릿한 긴장감을 주지만 반복되는 경험과 누적된 피로감은 어느 순간부터는 반전의 기대가 부재한 무덤덤한 결말의 기다림만 남는 꼴이었다.

 

[위험한 관계]의 여러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꼽자면 주저없이 메르테유 후작 부인을 뽑고 싶다. 메르테유 부인이 현실세계의 실제 인물이라면 사회뉴스란에 나오는 순진한(?) 남자들의 지갑을 노리는 꽃뱀(?)에 불과하겠지만 소설속 18세기 보수적인 프랑스 귀족사회에서의 메르테유 후작 부인은 여성이 남성의 단순한 성적 수단이나 불평등한 결혼제도의 종속적인 도구가 아닌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을 가진 독립된 인격으로의 나(我)라는 새로운 여성성의 상징이다. 물론 소설 말미에 메르테유 부인은 재판에서 패소한데다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상하고 한 쪽 눈까지 실명하는 인과응보의 상투적인 결말의 희생자로 묘사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르테유 부인의 성적 매력과 탁월한 심리전에 맥없이 무너지는 귀족 남성들의 찌질한 모습에서 근대적인 여성성의 탄생을 보았다면 나만의 잘못된 해석일까?

 

"자작님, 내가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압니까? 괜찮은 혼처를 찾지 못해서 그런게 아니랍니다. 어느 누구든 내 행동에 대해 말할 권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설사 결혼을 했다고 해도 난 분명 내 뜻대로 했을테니까요. 다만 누군가가 내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듣는게 성가시기 떄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속이는 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즐겁기 때문이랍니다"

                                                                                                                 [위험한 관계] p495

 

발몽 자작은 뭐 그저 그런 찌질한 바람둥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투르벨 법원장 부인을 사랑했지만 메르테유 부인과의 욕망의 거래 - 조건은 19금이다 - 를 성사시키고 사교계에서 자신의 평판과 명성을 높이기 위해 투르벨 부인을 버리는 비정한 남성이면서 동시에 메르테유 부인과의 게임에서 패배하자 그녀의 치부를 폭로하는 치졸한 남성에 불과하다.  

 

투르벨 법원장 부인, 볼랑주 세실, 당스니 기사는 메르테유 부인과 발몽 자작의 욕망을 채워주는 먹잇감과 놀이감에 불과한 인물들이다. 특히 볼랑주 세실 같은 아가씨는 한마디로 순진을 가장한 무지(無知)발랄 민폐형 캐릭터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당스니도 더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투르벨 법원장 부인은 봉건적인 여성상의 부정적인 전형으로 뭐랄까..... 만나면 만날수록 남자의 발목을 잡는 겁나는 미저리형 캐릭터로 볼 수 있다. 

 

소설의 인과응보적 결말은 작가의 자체 검열 이었을 것이다. 10 페이지 분량에 불과한 교훈적인 결말이라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전체 오백 페이지가 넘는 귀족사회의 욕망과 위선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와 메르테유 부인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근대적 여성성의 발아(發芽)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위험한 관계]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산을 오를 때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메르테유 후작 부인이다. 자신있게 말하지만 메르테유 부인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절대 영화화 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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