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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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와 주먹에 힘을 빼고, 툭 툭, 주먹으로 치는게 아니라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빨리 꺼내 온다는
느낌으로 팔을 뻗는거야. 툭 툭, 스탭을 밟으면서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툭 툭, 발의 움직임을 따라 목에 리듬을 타면서 툭 툭, 상대가 짜증이 나도록, 상대가 초조해지도록, 상대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도록 툭 툭, 계속해서 날리는거야. 그럼 알아서 무너져. 잽으로 다 무너뜨린 다음 한방에 보내는 거지.
이게 잽이라는 거다.‘
소설 ‘설계자들‘로 암살자와 설계자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던 김언수 작가의 단편집.
권투의 공격 기술인 잽의 설명에서 짐작 되듯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잽을 날리는 이들의 평범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무작정 권투를 배우는 반항기의 고교생, 머리 나쁜 여자와 금고를 털다 갇혀버린 금고털이범들, 단란주점 아가씨와 웨이터, 깡패들의 기싸움, 첫 섹스를 꿈꾸는
32살의 동정남, 아버지를 부양하느라 빈털터리가 된 동생과 아내의 눈칫밥을 먹고 사는 실업자 형의 갈등..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공감과 안타까움, 연민을 오가며 나름의 재미와 감동을 주는데,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작품은 ‘잽‘과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이었다.
‘잽‘은 교사라는,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적 행동에 권투 기술인 잽으로 대응하는 고교생의 이야기다.
교사에게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된 고교생이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고 매일 화장실을 청소하는 체벌을 선택한다.
하교길에 우연히 본 권투 전단지에 혹해 체육관을 찾아간 주인공은 관장에게 권투의 기술 중 하나인 잽을 배우며 일년동안 말없이 화장실 청소를 수행 해내고, 결국 졸업 직전 벌을 준 교사에게서 사과를 받아낸다.
잘못이 없으니 반성문은 못쓰겠다, 교사라는 지위를
앞세워 벌을 주겠다면 받겠다. 하지만, 당신이 옳아서
벌을 받는게 아니다..
반성문 대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주인공의 침묵은 끊임 없이 날리는 잽이 되어 결국 자신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권위를 지키기 위해 체벌을 한 교사를 쓰러뜨린 것이다.
무조건 어른의 뜻대로 따르라는 권위에 맞서
힘없는 위치의 미성년이 할 수 있는 저항은 일년이란
시간동안 자신의 부당함을 매일 목격하게 만드는
잽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
권위를 행사하기보다 부당하게 당하는 입장이 될 확률이 더 높은 평범한 우리들에겐 일면 통쾌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이야기다.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은 어느날 밤 귀가길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사방이 막힌 방에 감금된 주인공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그간의 활동을 고백하는 자술서를 쓰라는 그들의 어이 없는 요구를
받으며 시작된다.
처음엔 뭔가 착오가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강하게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던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황에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고문을 받으며 조금씩 그들의 요구에 맞춰 자술서를 쓰기 시작한다.
그들의 수정 요구대로 순순히 수정을 시작한 주인공은 자신의 요청대로 기꺼이 물적 지원을 해주고 수정한
진술서를 칭찬하는 그들에게 동화되며 점점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간첩활동 진술서를 작성하게 된다는 이야기.
어이 없고 유머러스한 상황과 대사들이 이어지며 웃음도 터지고, 흥미로운 몰입으로 순식간에 읽게 되지만 뒷맛은 잽보다 훨씬 쓰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누군가의 의도대로 기꺼이 바꾸게 되는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자신의 꿈과 소망마저 자발적으로 각색 해가며 맞춰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조롱이 아닐까..
나의 꿈이라고 믿어왔던 미래의 소망은 정말 오롯이 내가 키워온 나만의 꿈이었을까?

이야기들은 쉽게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그렇지만, 모든 단편들은 가볍기만 하지 않고 각기 다른 여운을 남기며 생각의 단초를 던져준다.
‘설계자들‘이 빼곡히 채워진 퍼즐 같았다면, 이 단편집은 적당히 여백이 있는 그림같은 느낌이랄까?
장편과 단편은 호흡이 달라 모두 잘 쓰기란 쉽지 않다던데, 그 말이 맞다면 김언수 작가의 필력은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음에도 단편을 낸다면 기꺼이 읽을 생각.
그러니 장르 구분 말고 부디 열심히 작업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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