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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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고 싶었을 뿐인데 소녀가 펼치려던 날개는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단어는 소녀를 고립시켰다. 이 책을 읽고나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였다.



전생에 나는 인어였다.

나는 깊은 바닷속에 살며 자유롭게 수영하고 갑각류를 먹고 다섯 옥타브의 발라드를 불렀다. 내가 내는 음이 바다에 잔물결을 일으켰고, 고래와 거북이, 해마 모두 매일 열리는 나의 콘서트를 찾아왔다.

그러나 땅 위에서 나는 겨우 숨을 쉰다. 인간들은 고기 대신 생선을 먹는 내 식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노래는 열망이 아닌 관념일 뿐이다.

그로운(GROWN)

수영을 좋아하고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인챈티드는 우연히 오디션에서 마주친 세계적인 알앤비 가수 코리 필즈와 만나게 된다. 코리 필즈는 처음부터 인챈티드를 '브라이트 아이즈'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고등학생 소녀의 사소한 일상을 궁금해하면서 걱정해주는 그는 인챈티드에게 가장 다정한 메시지와 대화와 미소를 건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인 그는 스물 여덟 살이었고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챈티드는 그를 믿는다. 특히 윌앤드윌로우 지역모임에서 댄스 파티가 열렸을 때 같은 회원으로 알고 지내는 남자아이가 인챈티드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하려고 했을 때 코리 필즈는 "브라이트 아이즈, 날 믿어. 언젠간 너도 네가 아니라 상대편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내밀었던 그 손을 인챈티드는 잡지 말았어야 했다.

코리 필즈는 먹잇감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다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가두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길들인다. 그에게 처음 만난 소녀들은 늘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렇게 처음에 가졌던 감정은 손아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배와 착취라는 수순을 밟는다. 모두 재능있고 아름답고 꿈을 좇는 소녀들이었다. 코리의 말을 신뢰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넘어간 소녀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너무 늦은 때였다.

《그로운》의 작가 티파니 D. 잭슨은 2017년 청소년 범죄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혐의Allegedly》로 데뷔했으며 흑인 소녀 중심의 흥미진진한 서사로 각광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자 인종차별·성차별·그루밍 성폭력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의 위치까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현실의 공포가 더욱 다가온다. 성적 착취와 학대에서 여성에 비해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있는 남성들 중에는 여전히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성폭력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피해자에게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밤 늦게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서' '술을 마시고 스스로 갔으니 그런 것 아닌가' 라는 등 피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적극적인 태도는 보이는 경우가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어야만 피해자는 비로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인챈티드는 코리 필즈를 알아갈수록 뮤직비디오에서 상업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뮤직비디오보다 키가 작고 그리스 신을 유화로 그려놓은 것 같은 외모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코리 필즈는 인챈티드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면서 공감대와 호감을 얻어낸다. 그래서 처음 코리가 하이드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소변을 볼 얼음통 하나를 넣어주면서 방에 열여섯 시간을 가뒀을 때도 술에서 깨면 미안해하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속 코리는 훨씬 크다. 함께 춤추는 여자들 위로 키가 한참 솟아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평범한 키다. 그렇다고 작다는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처럼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만큼 크지는 않다는 거다. 그보다는 스테판 커리에 더 가깝다.

그로운(GROWN)

코리 필즈는 오랫동안 십대 소녀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으며 성착취를 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성착취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소녀들이 어떻게 그루밍 성범죄에 당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코리 필즈의 사회적 지위와 필모를 보며 소녀들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접근했다고 여긴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소녀에게 남자는 계속 자신만의 성경을 만든다. 자신은 신이고 자신의 왕국에서 여자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그가 손가락으로 멀리사의 끝을 만지며 배배 꼰다.

"성경에 여자는 머리를 밀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 그건 주님을 거스르는 죄야."

입을 열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성경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나는 전혀 모르는 것인데.

그로운(GROWN)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잊힐 만하면 터지는 스토킹. 그루밍. 불법촬영물 범죄사건들이 떠올랐다.

n번방으로 인터넷에 영구박제되어 고통받는 여성들은 동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해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책 속에서 코리 필즈가 하는 게임을 보면 그들의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답이 보인다. 처음부터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대도 착취도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이런 괴물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며 그런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전생에 인어'였던 열 일곱살 소녀의 열 여덟 살에는 잘린 날개에서 피가 아닌 희망이 싹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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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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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에세이는 씩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작가의 글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가다가 시원하고 맑은 시냇물과 만나는 기분이 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에 SBS아나운서로 입사한다. 마지막 뉴스 방송 클로징에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닦는 박선영 아나운서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팟캐스트가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기억되는 일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상상 속 아나운서의 모습과 현실 속 아나운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입사 1년 만에 다른 직업을 몰래 알아보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서 불행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결국 작가는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뒤 퇴사를 선택한다.

자신의 불행을 실패하고 생각했던 작가는 "퇴사는 마음이 가난했고 행복하지 않았던 내가 나를 지키고 다시 한 번 생명력을 틔워보려고 했떤 꽤나 절박했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아나운서가 되었고 어린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든 것이 빨랐던 작가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어린 나이에 성공했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평가는 자신의 행복과 크게 않는다. 내게 있는 행복의 가치는 자신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다.

불행의 감정을 실패에서 찾았으며 그 원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퇴사를 결심한 작가는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겠다는 선언도 한다. 아직 어린데,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진다는 말이 멋지게 들렸다.

20대 중반에 퇴사를 결심하고 자신의 시간을 써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한 작가에게는 누구보다 멋진 부모님들도 함께 했다.

나는 특히 "날개 달았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렴."이라고 보낸 엄마의 문자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자식이 하는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는 그 말이 자유를 향해 새로운 길로 나아가다가 넘어지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올 곳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든든한 믿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토록 씩씩하고 명랑한 20대를 보내고 있는 작가를 보면서 아직도 그늘에 묻혀 있는 나의 20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각자 1인분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던 우리 가족은 실패는 곧 끝이라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 한 점 주지 못한 채 살았다. 직장이 없는 시기에는 비난이 쏟아졌고 그로 인해 연락이 자주 끊겼다. 힘든 마음을 털어낼 수 있는 가족이 없었던 탓에 불행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 시기였다. 그런 20대 때 나는 자주 아팠고 파괴되었다는 감정을 느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지금은 내게도 10대, 20대 아이들이 있다. 내가 받았던 상처를 아이들에게 혹여라도 되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주 감정을 정리하고 일관성 없는 태도는 진작에 버렸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린 나이에 아나운서가 되었고 퇴사했다가 블로그에 글을 써서 책을 출간했으며 로스쿨 자격 시험을 준비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유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아이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든든한 믿음으로 지탱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날개 달았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순간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는 뜬금없는 말. 날개가 뭘 의미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내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퇴사한 나는 날개가 떨어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퇴사한 내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건지, 수수께끼 같은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날개?' 하고 물으니 잠시 뒤 엄마는 달랑 두 글자를 보내왔다.

'자유.'

도망치는 게 어때서

요즘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자꾸 성적 때문에 불안감을 느껴 초조해한다. 불안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으니 네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으라고, 성적이 너의 가치가 아니라고 말해주지만 그런 말로 아이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주변에서 모두 성적과 관련된 말과 정보를 쏟아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말은 현실적인 조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의 불안을 토닥이며 변함없이 너의 자유로운 선택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는 줄 수 있을 것이다. 실패가 끝이 아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있으면 되는 거라고. 우리는 너무 실패를 두려워해서 결국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는 것 같다. 끝없는 시험으로 이어지는 입시제도가 걸려있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족쇄가 되지 않도록 불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대부분의 책들은 나의 감정에 부딪혀서 태도를 변화시키겠다는 결말로 나아가는데, 이번 책은 작가의 씩씩하면서도 실패에 물들지 않은 태도 때문인지 내 아이들이 자꾸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해주는 부모는 되지 못해도 모든 길에 든든하게 서있는 부모가 되자는 결심과 함께.


당장의 결과가 나의 가치를 정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과는 값으로 표현될 뿐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온다. 매일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 표정, 고난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들이 '나'를 만들고 노력하는 과정, 고민하는 시간,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는 경험이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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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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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야, 지구는 빙글빙글 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고양이 한 마리도 절대 지구 밖으로 떨어지지 않아. 우리를 부들고 있는 중력은 위대해. 왜 이런 말을 네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그리고 희아야,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별들은 소통하는 법을 몰라. 서로를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언어가 숨어있는 세계/ 김지호

별들은 소통하는 법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

김지호 언어치료사가 희아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이 문장에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며 환한 빛이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의 부정적인 모습(인간은 어차피 혼자라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나)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언어 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8년차 언어치료사 김지호가 2007년부터 지난 겨울까지 만났던 아이들 중에서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적은 에세이다.

언어치료사로서 처음으로 말더듬는 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지뢰밭 게임 속 지뢰를 두려움 없이 터뜨리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까지.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의 풍경과 날씨, 첫 인상과 첫 인사, 방안의 소소한 물건까지 기억하며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눈에 보이듯 그려내는 글들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눈물이 차올랐다가, 마지막에는 부디 잘 살아가기는 마음에 이르렀다.

김지호 언어치료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보람을 느끼지만 적지 않은 순간마다 제자리에 머물거 있거나 혹은 뒤쳐진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을 느끼는 순간에도 가장 바라는 것은 "이 아이들이 평범한 아이들처럼 재잘댈 수 있기를 바라며 언어치료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알 수 있다.

스물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 스물 다섯 명을 돌보는 더 많은 가족들이 등장한다.

장애 아동을 둔 가정이 평온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아픈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사이 다른 아이는 소외되는 경험으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아플 수 있다. 돌봄을 담당하는 보호자의 삶은 고달프고 지친다. 장애 아동을 비롯해 보호자, 가족들이 소외되지 않고 서로 지지해야 가정 내의 흔들림은 줄어들고 평온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고민, 불안과 공포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회복할 수 있다."

작가는 아동과 보호자(특히 어머니)가 가족 내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가족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며 언제든지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장애인을 돌보고 있는 가족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가족에게 친구, 이웃으로 범위를 넓혀 공동체의 나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럴 때면 생각하렴,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네가 있다고 말이야.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거야. 말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 역설적이게도 그게 우리가 낯선 이들과 끊임없이 말과 글을 나누는 이유란다. 이렇게 너를 기억하며 편지를 쓰는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야. 우리는 서로 어떻게든 이어져 있단다. 그러니까 외로워 마, 알겠지?

언어가 사는 세계/ 김지호

남들과 다른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신들이 죽고 난 다음 아이가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걱정일 것이다. 복지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운영된다면 그런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김지호 언어치료사는 차등화에 기초한 장애인 지원 정책과 정부가 직접 운영하지 않고 위탁 운영하는 시설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고 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신이의 엄마가 삭발식을 하면서 장애인 지원 정책에 대해 싸우는 현실은 가슴 아팠다. 동시에 우리가 장애를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언어치료사로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 곳곳에는 언어로 담지 못할 따스하고 가슴 아린 풍경들이 담겨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힘은 소중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든든한 마음의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읽은 뒤 읽은 책이라서 언어 장애에 대한 의미와 우리가 나누어야 할 과제가 더 크게 다가왔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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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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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구멍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던질 것인가.

만약 그 구멍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찾을까, 찾을 수 없도록 숨길까.

희연이 속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만 구멍을 향해 던진 돌멩이는 잠깐 떠 있다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빨려 들어갔다. 그 뒤로 돌멩이는 다시 볼 수 없었다. 구멍을 향해 던진 모든 것들은 부서지면서 사라졌다. 돌멩이에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구멍을 응시하던 필희도 그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 구멍의 존재를 알게 된 필희의 실종 이후 희연은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품고 살아가게 된다.

필희는 까만 구멍을 골똘히 쳐다봤다. 희영이 던진 돌이 공중에 떠 있다가 가루가 되어 빨려 들어가는 걸 숨죽이고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라졌다. 희영이 던진 돌처럼 감쪽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미확인 홀/ 김유원



『미확인 홀』은 작고 평온한 마을에 생긴 정체불명의 구멍과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서사는 상실로 인한 상처에 기인하고 있다. 동시에 상처는 상실의 범위를 넓혀간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상처이기에 허공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처럼 위태로운 순간들이 쌓이면서 삶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라진 사람은 아무 말도 없고 남아있는 사람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상실은 고독하다. 깊은 상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얼마 되지 않을 터이니.

은수리에서 처음 미확인 홀을 발견한 희영은 절친 필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필희는 홀에 던진 돌멩이가 사라지는 순간을 오래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실종되었다. 홀로 빨려들어갔는지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필희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의 중요한 것이다.

필희가 사라진 뒤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오직 '사라진' 필희에게 집중되어 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다른 일을 해도 마지막에는 필희의 부재가 당연한 수순처럼 삶의 중심에 고여 있었다. 너무 오래 고여 있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오랫동안 아팠다.

상실에서 오는 상처를 숨기면서 매끈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꾸몄던 희연의 가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블랙홀'이라는 단어가 적힌 쪽지 한장에서 시작된다. 희연에게만 상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연의 남편, 사라진 필희의 동생 필성. 은정의 아빠와 도망친 순옥.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활발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피해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길 것 같은 사람들.

그들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의 상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행복해보이는 얼굴 뒤에도 상실과 상처는 존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삶은 상실로 인한 공동까지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일수록 비어있는 공동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상실을 오래 겪은 사람일수록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속에 호수 밑으로 사라지는 일몰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아파서 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들이 떠올랐다.

필성은 말했다. 매미가 울면 매미를 봐야 한다고.

매미가 울면 매미를 봐야죠. 매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잖아요. 저러다가 미쳐서 죽는 거라고요.

미확인 홀/ 김유원

소설을 읽으면서 필성의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매미의 울음을 탓하기 전에 우는 매미를 봐야 하는데, 다른 이의 상실과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 없이 그 일은 쉽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매미들의 울고 있는데 그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탓하는 소리들만 많은 것 같다. 너무 쉽게 잊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오래도록 겪는 상실은 고독하지만 여럿이 나누는 상실은 덜 고독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을 부수고 빨아들이는 미확인 홀의 존재가 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도록 연결의 고리들이 단단하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미확인 홀』은 희연이 은수리에게 처음 발견한 블랙홀 이후 필희의 실종,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싱크홀과 비슷한 미확인 홀이라는 시작으로 다소 미스터리하게 시작하지만 서사의 내부는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있다. 따뜻한 봄볕 아래에서 펼치면 좋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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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마음 -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
이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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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반복하는 천칭은 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세상과, 공동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 주는 것 같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소비를 통해, 소유를 통해, 그리고 소비와 소유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정의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지겹지만 멈출 수 없는, 그 저울질에 관한 이야기다.

사는 마음/ 이다희

책머리에서 작가는 처음에는 결정하는 저울질이 물건의 유용성과 예산을 비교하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추억의 가치나 브랜드의 윤리성, 여성으로서 느끼는 사회적 압박 같은 것들이 올라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올라가는 물건들과 반대로 올라갔지만 내리는 것들. 그러게 올리고 내리는 저울질의 반복 속에서 작가의 사유는 성장하고 바뀌고 넓어졌나보다.

이다희 번역가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를 번역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필한 고 이윤기 번역가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번역하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온 이다희 번역가는 아버지 생전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첫 권을 함께 작업하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혼자서 6년 동안 작업하여 총 10권을 완간했다고 한다.

작품에 번역가의 이름은 작게 기록되지만 번역에 따라 작품은 크게 달라진다. 오역과 어색한 번역은 작품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가의 양쪽 어깨는 참으로 무거울 것 같다.

몇 년 전 여름 <하얀 국화>를 읽고 한동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 책의 번역가가 바로 이다희였다. 아버지와 딸, 두 분 모두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번역을 하는 건지 존경스럽다..

누구가 물건을 고를 때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가성비라는 말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요즘 소비생활 속에서도 가성비 외에 나를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드는 또다른 기준 같은 것.

이다희 번역가는 첫눈에 반한 물건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책상을 사러 갔을 때의 일화는 귀엽고 따뜻한 그림처럼 그려진다. 소공녀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것 같은 덮개가 있는 책상을 고르는 아이. 나는 살아가면서 그런 적이 별로 없기에 아이의 의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흔쾌히 받아들여주시는 부모님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건을 사는 마음은 바이올린, 책상, 종이에 이어 집까지 이어진다. 이다희 번역가가 저울에 올린 물건들은 가성비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별로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금방 써버려서 사라지는 물건이 아닌 이상 물건은 오래도록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어야 하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좋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낡은 물건들이 꽤 많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성비나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샀던 물건들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오랜 결혼이 끌고 온 그림자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혼 후 재택근무를 하며 꾸준히 일을 했지만 돈은 늘 부족했기 때문에 가성비로 거의 들여놓은 물건들이다. 그나마 내가 좋아해서 고르는 물건이라면 책과 커피 정도인 것 같다. 외모를 꾸미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옷도 신발도 별로 없다.

요즘은 필요하면 당근에서 가장 마음에 들면서 가성비가 좋은 물건을 선택한다. 녹색당에 가입하면서부터는 더욱 새로운 옷은 아예 사지 않는다. 옷도 가방도 오래된 것들 뿐이지만 나는 책은 읽고 싶은 순간 바로 사는 편이다. 그게 부담스러울 때는 이렇게 서평단에 신청해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그리고 커피에는 진심이어서 향과 산미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만들거나 드리퍼나 클로버로 원두를 내려 마신다. 나이가 들면서 필요한 물건은 최소한으로 내게 기쁨을 주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저울에 올려놓아야 할 물건들의 목록이 좀더 선명해진다.


'사는 마음'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건을 사는 마음과 삶을 사는 마음.

서른 여섯에 암이 발명해서 몇 년 동안 투병을 했던 이다희 번역가는 '살기로 선택'하고 '삶을 고집하기로'했고 '소비하는 행위를 즐거운 행위로 만들기로'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건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면 "삶이 즐겁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행위가 즐거워야 한다"는 그의 말은 "즐겁지 않은 소비는 하지 않기로 한다"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도 올바른 소비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물건 뒤에는 노동이 숨어있고 노동에는 착취와 희생이 감춰져 있고 자본은 그런 노동을 딛고 더욱 커지고 그런 과정에서 환경은 망가지기 때문이다.

이다희 번역가가 선택한 물건들 (바이올린, 책상, 만년필을 위한 종이, 집 등) 중에서 책상과 집은 나도 선택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과 나의 수입 능력을 고려할 때 지불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오래전 마트에서 샀던 고동색 나무에 검정 유리가 깔린 책상을 오래도록 쓸 것 같다. 처음에는 무겁고 다소 높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 책상에서 나는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 컴퓨터과 프린터기를 올려놓았던 책상에 요즘은 노트북과 독서대가 올려져있다. 따로 내 방이 없기 때문에 책상은 지금 부엌에 있다. 처음에 반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드는 이 책상과는 아무래도 오래도록 친하게 지낼 것 같다.

자신만의 방에서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이다희 작가는 '능동적인 번역가'가 될 생각에 영어원서 읽기 모임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좋은 책을 고르는 사이 그의 번역이 어떻게 연대되고 확장되는지 기대가 된다.

“능동적인 번역가는 기획하는 번역가라는 의미예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좋은 책을 고르면서 제 독서경험이 더 풍부해질 테고, 좋은 책을 발견하면 출판사 측에 출간 제안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번역 일을 해나갈 생각이에요.”

한겨레 / 문화&책 생각/번역가를 찾아서

살고 싶은 마음과 소중한 가치를 저울에 올리는 마음.

돈을 버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은 내가 따뜻한 체온을 가진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그런 마음을 돌아보게 된 독서였다.


어딘가 화수분을 숨겨 둔 사람이 아니라면, 매월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도록 애쓴느 사람이라면 지겹도록 해야 하는 것이 저울질이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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