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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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고 싶었을 뿐인데 소녀가 펼치려던 날개는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단어는 소녀를 고립시켰다. 이 책을 읽고나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였다.



전생에 나는 인어였다.

나는 깊은 바닷속에 살며 자유롭게 수영하고 갑각류를 먹고 다섯 옥타브의 발라드를 불렀다. 내가 내는 음이 바다에 잔물결을 일으켰고, 고래와 거북이, 해마 모두 매일 열리는 나의 콘서트를 찾아왔다.

그러나 땅 위에서 나는 겨우 숨을 쉰다. 인간들은 고기 대신 생선을 먹는 내 식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노래는 열망이 아닌 관념일 뿐이다.

그로운(GROWN)

수영을 좋아하고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인챈티드는 우연히 오디션에서 마주친 세계적인 알앤비 가수 코리 필즈와 만나게 된다. 코리 필즈는 처음부터 인챈티드를 '브라이트 아이즈'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고등학생 소녀의 사소한 일상을 궁금해하면서 걱정해주는 그는 인챈티드에게 가장 다정한 메시지와 대화와 미소를 건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인 그는 스물 여덟 살이었고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챈티드는 그를 믿는다. 특히 윌앤드윌로우 지역모임에서 댄스 파티가 열렸을 때 같은 회원으로 알고 지내는 남자아이가 인챈티드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하려고 했을 때 코리 필즈는 "브라이트 아이즈, 날 믿어. 언젠간 너도 네가 아니라 상대편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내밀었던 그 손을 인챈티드는 잡지 말았어야 했다.

코리 필즈는 먹잇감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다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가두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길들인다. 그에게 처음 만난 소녀들은 늘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렇게 처음에 가졌던 감정은 손아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배와 착취라는 수순을 밟는다. 모두 재능있고 아름답고 꿈을 좇는 소녀들이었다. 코리의 말을 신뢰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넘어간 소녀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너무 늦은 때였다.

《그로운》의 작가 티파니 D. 잭슨은 2017년 청소년 범죄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혐의Allegedly》로 데뷔했으며 흑인 소녀 중심의 흥미진진한 서사로 각광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자 인종차별·성차별·그루밍 성폭력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의 위치까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현실의 공포가 더욱 다가온다. 성적 착취와 학대에서 여성에 비해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있는 남성들 중에는 여전히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성폭력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피해자에게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밤 늦게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서' '술을 마시고 스스로 갔으니 그런 것 아닌가' 라는 등 피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적극적인 태도는 보이는 경우가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어야만 피해자는 비로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인챈티드는 코리 필즈를 알아갈수록 뮤직비디오에서 상업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뮤직비디오보다 키가 작고 그리스 신을 유화로 그려놓은 것 같은 외모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코리 필즈는 인챈티드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면서 공감대와 호감을 얻어낸다. 그래서 처음 코리가 하이드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소변을 볼 얼음통 하나를 넣어주면서 방에 열여섯 시간을 가뒀을 때도 술에서 깨면 미안해하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속 코리는 훨씬 크다. 함께 춤추는 여자들 위로 키가 한참 솟아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평범한 키다. 그렇다고 작다는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처럼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만큼 크지는 않다는 거다. 그보다는 스테판 커리에 더 가깝다.

그로운(GROWN)

코리 필즈는 오랫동안 십대 소녀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으며 성착취를 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성착취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소녀들이 어떻게 그루밍 성범죄에 당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코리 필즈의 사회적 지위와 필모를 보며 소녀들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접근했다고 여긴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소녀에게 남자는 계속 자신만의 성경을 만든다. 자신은 신이고 자신의 왕국에서 여자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그가 손가락으로 멀리사의 끝을 만지며 배배 꼰다.

"성경에 여자는 머리를 밀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 그건 주님을 거스르는 죄야."

입을 열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성경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나는 전혀 모르는 것인데.

그로운(GROWN)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잊힐 만하면 터지는 스토킹. 그루밍. 불법촬영물 범죄사건들이 떠올랐다.

n번방으로 인터넷에 영구박제되어 고통받는 여성들은 동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해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책 속에서 코리 필즈가 하는 게임을 보면 그들의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답이 보인다. 처음부터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대도 착취도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이런 괴물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며 그런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전생에 인어'였던 열 일곱살 소녀의 열 여덟 살에는 잘린 날개에서 피가 아닌 희망이 싹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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