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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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는 배달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생산 활동을 하는 일터다. 오토바이와 택배차가 달리는 동선을 이어보면, 도시 전체를 돌리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가 드러난다. 배달노동자들은 이 기계에 몸이 빨려 들어가거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다. 공장 안에서 벌어졌다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산재다. 하루 6명이 일하다 사망해도 변화가 없는 나라다. 이 사망사고는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공장의 파쇄기에서, 시골의 비닐하우스에서, 펜스가 쳐진 공사현장에서,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을 내뿜는 공장 안에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그러나 플랫폼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기계는 차량 운전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 유코차를 끌고 가는 부모 꿀잠을 자고 싶은 주민 옆에서 돌아간다. 김용균이 죽은 석탄발전소가, 삼성 노동자가 죽은 반도체 공장이 내 집 앞 길거리에서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언젠가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버스와 승용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인 6차선 도로였다. 도로를 꽉 채운 차량에 비해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신호는 짧았다. 다음 신호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차량들은 꼬리물기를 했고, 그로 인해 신호를 못 탄 다른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 사이로 오토바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다.

서로 뒤엉켜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로를 보면서도, 보행자인 나는 내가 건너는 횡단보도가 확보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을 뿐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도로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언제쯤 신호가 바뀌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충돌에 이은 쿵 하고 추락하는 소리.

버스가 왼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아래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다. 운전자는 오토바이에서 조금 떨어져서 쓰러져 있었다. 일순간 차량들은 멈췄고 버스 운전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때 나는, 보행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쓰러진 오토바이 운전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을까. 크게 다쳤을까.

오토바이 운전자는 잠시 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주저앉았다가 쓰러졌다. 꽉 막힌 도로라서 버스가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트는 순간 부딪혔으니까 충격이 컸을 것이다. 주변을 맴도는 소리들이 들렸다. 정말 라이더들이 문제야. 저러니까 사고가 나지. 자기만 다치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잖아. 맞는 말이었다. 시민들에게 배달 오토바이는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번에도 버스가 차선을 바꾸려고 하는 순간 오토바이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벌어진 사고였다.

도로에서 위험한 라이더들을 많이 본다. 어쩔 때는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다. 차에 타고 있으면 내가 탄 차에 부딪힐까봐 놀라고, 걷고 있을 때는 보행신호에 달려드는 오토바이에 놀란다. 정말 라이더들의 운전은 너무 위험했다. 문제였다. 그럼, 정말 라이더들의 모든 문제의 원인일까.

코로나 이후로 배달플랫폼은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빠르게 배달되는 음식들은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였다. 사람들의 휴대전화에는 배달앱들이 몇 개씩 깔렸다.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빠르게 맛있는 음식을 집에서 먹을 수 있다. 새롭게 나타난 어떤 버튼은 더 빨리 배달이 된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할인 쿠폰을 선물로 준다. 배달 버튼을 누르지 않을 이유가 사라진다. 일회용 플라스틱이 쌓이고 도로 위 교통사고가 쌓이고 매장업주들의 부담이 쌓이지만, 소비자들에게는 배달플랫폼기업이 주는 편리함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소비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배달플랫폼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함 '라이더유니온' 초대 위원장이자 7년 차 배달라이더 박정훈 작가가 일하면서 직접 겪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안전의 문제, 배달노동자들의 독특한 직업 환경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법과 제도에서 방치된 배달산업의 구조와 전투 콜이 노동안전에 미치는 영향, 빠른 배달과 위험에 내몰린 배달노동자들을 양산시키는 알로리즘의 속성, 사고가 나도 책임을 지우기 어려운 배달산업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한 후 기업의 책임을 묻는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산재 신청과정과 방법을 다룬 부록은 마지막에 있다.

<뼈가 부러져도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는 이유> 부분을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면허가 없어도 오토바이가 없어도 괜찮은 이 세계에서 초보는 늘 환영이다. 하지만 라이더가 되면서부터 모든 책임은 오직 라이더에게 있다. 그 다음 챕터에 나오는 전투콜은 라이더에게 과속을 부추긴다. 과속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갑자기 달려드는 오토바이 때문에 놀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화가 났었으니까. 과속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데, 라이더의 안전을 위해 이륜차 배송을 없애고 자동차 배송만을 하자고 하면 찬성해줄까. 라이더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빠른배송을 포기하라는 주장을 한다면, 찬성해줄 수 있을까.

우리 눈에 쉽게 보이고 자주 보이는 배달노동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배달산업은 배달노동자의 생명을 먹으며 계속해서 성장했고, 도로는 전쟁터로 변했다. 전사자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살아남은 자는 '딸배(배달노동자를 비하하는 은어)'가 된다.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날에 쿠팡이츠는 5건 하면 추가 보너스를 주겠다는 알림과 문자를 보냈다."는 배달 라이더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노동자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숨겨진 배달플랫폼기업의 태도는, 노동자를 사람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소중하다. 자유는 좋다. 자유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자유는 위험하다.

'노동의 자유' '노동의 유연화' ...이런 말들이 들려오면 저울에 무게를 재고 싶어진다. 누구의 기준에서, 누구에게 좋은 '자유' '유연화'인지.

글의 시작부분에서 나는 사고를 낸 배달노동자의 위험한 오토바이 운전에 대해 비난하는 시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에 나는 배달노동자와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다.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널 수만 있다면 도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전투는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민이자 소비자이자인 나는 배달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배달노동자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다. 배달앱을 누르는 소비자는 배달플랫폼기업을 성장시켰고 그 성장의 동력에는 라이더들이 존재했다. 소비자는 빠른 배달의 편리성을 마음껏 누리면서 그걸 완성시키기 위한 도로 위 라이더에게는 비난을 한다. 배달플랫폼기업에게는 하는 방법을 모르니, 눈에 보이는 라이더들에게만 그렇게 한다.

비단 배달플랫폼 뿐 아니라 수많은 플랫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좁은 범위의 자유와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 "노동이 쪼개지고 유연화되는 것만큼 기업도 쪼개지고 유연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모든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지우는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들을 잊지 말자. 자유와 유연화를 자주 말하는 이에게 묻고 싶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뭉퉁거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정확히 말해달라고.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출근했다가 무사히 퇴근해 소중한 사람과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게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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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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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고 싶었을 뿐인데 소녀가 펼치려던 날개는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단어는 소녀를 고립시켰다. 이 책을 읽고나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번째 이미지였다.



전생에 나는 인어였다.

나는 깊은 바닷속에 살며 자유롭게 수영하고 갑각류를 먹고 다섯 옥타브의 발라드를 불렀다. 내가 내는 음이 바다에 잔물결을 일으켰고, 고래와 거북이, 해마 모두 매일 열리는 나의 콘서트를 찾아왔다.

그러나 땅 위에서 나는 겨우 숨을 쉰다. 인간들은 고기 대신 생선을 먹는 내 식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노래는 열망이 아닌 관념일 뿐이다.

그로운(GROWN)

수영을 좋아하고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인챈티드는 우연히 오디션에서 마주친 세계적인 알앤비 가수 코리 필즈와 만나게 된다. 코리 필즈는 처음부터 인챈티드를 '브라이트 아이즈'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고등학생 소녀의 사소한 일상을 궁금해하면서 걱정해주는 그는 인챈티드에게 가장 다정한 메시지와 대화와 미소를 건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인 그는 스물 여덟 살이었고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챈티드는 그를 믿는다. 특히 윌앤드윌로우 지역모임에서 댄스 파티가 열렸을 때 같은 회원으로 알고 지내는 남자아이가 인챈티드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하려고 했을 때 코리 필즈는 "브라이트 아이즈, 날 믿어. 언젠간 너도 네가 아니라 상대편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내밀었던 그 손을 인챈티드는 잡지 말았어야 했다.

코리 필즈는 먹잇감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다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가두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길들인다. 그에게 처음 만난 소녀들은 늘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렇게 처음에 가졌던 감정은 손아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배와 착취라는 수순을 밟는다. 모두 재능있고 아름답고 꿈을 좇는 소녀들이었다. 코리의 말을 신뢰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넘어간 소녀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너무 늦은 때였다.

《그로운》의 작가 티파니 D. 잭슨은 2017년 청소년 범죄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혐의Allegedly》로 데뷔했으며 흑인 소녀 중심의 흥미진진한 서사로 각광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자 인종차별·성차별·그루밍 성폭력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의 위치까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현실의 공포가 더욱 다가온다. 성적 착취와 학대에서 여성에 비해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있는 남성들 중에는 여전히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성폭력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피해자에게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밤 늦게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녀서' '술을 마시고 스스로 갔으니 그런 것 아닌가' 라는 등 피해자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적극적인 태도는 보이는 경우가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어야만 피해자는 비로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인챈티드는 코리 필즈를 알아갈수록 뮤직비디오에서 상업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뮤직비디오보다 키가 작고 그리스 신을 유화로 그려놓은 것 같은 외모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코리 필즈는 인챈티드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면서 공감대와 호감을 얻어낸다. 그래서 처음 코리가 하이드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소변을 볼 얼음통 하나를 넣어주면서 방에 열여섯 시간을 가뒀을 때도 술에서 깨면 미안해하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속 코리는 훨씬 크다. 함께 춤추는 여자들 위로 키가 한참 솟아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평범한 키다. 그렇다고 작다는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처럼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만큼 크지는 않다는 거다. 그보다는 스테판 커리에 더 가깝다.

그로운(GROWN)

코리 필즈는 오랫동안 십대 소녀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으며 성착취를 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성착취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소녀들이 어떻게 그루밍 성범죄에 당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코리 필즈의 사회적 지위와 필모를 보며 소녀들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접근했다고 여긴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소녀에게 남자는 계속 자신만의 성경을 만든다. 자신은 신이고 자신의 왕국에서 여자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그가 손가락으로 멀리사의 끝을 만지며 배배 꼰다.

"성경에 여자는 머리를 밀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 그건 주님을 거스르는 죄야."

입을 열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성경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나는 전혀 모르는 것인데.

그로운(GROWN)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잊힐 만하면 터지는 스토킹. 그루밍. 불법촬영물 범죄사건들이 떠올랐다.

n번방으로 인터넷에 영구박제되어 고통받는 여성들은 동영상 유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해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책 속에서 코리 필즈가 하는 게임을 보면 그들의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답이 보인다. 처음부터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대도 착취도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이런 괴물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며 그런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전생에 인어'였던 열 일곱살 소녀의 열 여덟 살에는 잘린 날개에서 피가 아닌 희망이 싹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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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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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에세이는 씩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

명랑하고 긍정적인 작가의 글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가다가 시원하고 맑은 시냇물과 만나는 기분이 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에 SBS아나운서로 입사한다. 마지막 뉴스 방송 클로징에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닦는 박선영 아나운서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팟캐스트가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기억되는 일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상상 속 아나운서의 모습과 현실 속 아나운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입사 1년 만에 다른 직업을 몰래 알아보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서 불행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결국 작가는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뒤 퇴사를 선택한다.

자신의 불행을 실패하고 생각했던 작가는 "퇴사는 마음이 가난했고 행복하지 않았던 내가 나를 지키고 다시 한 번 생명력을 틔워보려고 했떤 꽤나 절박했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아나운서가 되었고 어린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든 것이 빨랐던 작가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어린 나이에 성공했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평가는 자신의 행복과 크게 않는다. 내게 있는 행복의 가치는 자신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것이다.

불행의 감정을 실패에서 찾았으며 그 원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퇴사를 결심한 작가는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겠다는 선언도 한다. 아직 어린데,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진다는 말이 멋지게 들렸다.

20대 중반에 퇴사를 결심하고 자신의 시간을 써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한 작가에게는 누구보다 멋진 부모님들도 함께 했다.

나는 특히 "날개 달았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렴."이라고 보낸 엄마의 문자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자식이 하는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는 그 말이 자유를 향해 새로운 길로 나아가다가 넘어지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올 곳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든든한 믿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토록 씩씩하고 명랑한 20대를 보내고 있는 작가를 보면서 아직도 그늘에 묻혀 있는 나의 20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각자 1인분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던 우리 가족은 실패는 곧 끝이라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 한 점 주지 못한 채 살았다. 직장이 없는 시기에는 비난이 쏟아졌고 그로 인해 연락이 자주 끊겼다. 힘든 마음을 털어낼 수 있는 가족이 없었던 탓에 불행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 시기였다. 그런 20대 때 나는 자주 아팠고 파괴되었다는 감정을 느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지금은 내게도 10대, 20대 아이들이 있다. 내가 받았던 상처를 아이들에게 혹여라도 되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주 감정을 정리하고 일관성 없는 태도는 진작에 버렸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린 나이에 아나운서가 되었고 퇴사했다가 블로그에 글을 써서 책을 출간했으며 로스쿨 자격 시험을 준비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유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아이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든든한 믿음으로 지탱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날개 달았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순간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는 뜬금없는 말. 날개가 뭘 의미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내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퇴사한 나는 날개가 떨어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퇴사한 내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건지, 수수께끼 같은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날개?' 하고 물으니 잠시 뒤 엄마는 달랑 두 글자를 보내왔다.

'자유.'

도망치는 게 어때서

요즘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자꾸 성적 때문에 불안감을 느껴 초조해한다. 불안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으니 네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으라고, 성적이 너의 가치가 아니라고 말해주지만 그런 말로 아이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주변에서 모두 성적과 관련된 말과 정보를 쏟아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말은 현실적인 조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의 불안을 토닥이며 변함없이 너의 자유로운 선택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는 줄 수 있을 것이다. 실패가 끝이 아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있으면 되는 거라고. 우리는 너무 실패를 두려워해서 결국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는 것 같다. 끝없는 시험으로 이어지는 입시제도가 걸려있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족쇄가 되지 않도록 불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대부분의 책들은 나의 감정에 부딪혀서 태도를 변화시키겠다는 결말로 나아가는데, 이번 책은 작가의 씩씩하면서도 실패에 물들지 않은 태도 때문인지 내 아이들이 자꾸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해주는 부모는 되지 못해도 모든 길에 든든하게 서있는 부모가 되자는 결심과 함께.


당장의 결과가 나의 가치를 정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과는 값으로 표현될 뿐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온다. 매일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 표정, 고난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들이 '나'를 만들고 노력하는 과정, 고민하는 시간,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는 경험이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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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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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아야, 지구는 빙글빙글 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고양이 한 마리도 절대 지구 밖으로 떨어지지 않아. 우리를 부들고 있는 중력은 위대해. 왜 이런 말을 네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그리고 희아야,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별들은 소통하는 법을 몰라. 서로를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언어가 숨어있는 세계/ 김지호

별들은 소통하는 법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

김지호 언어치료사가 희아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이 문장에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며 환한 빛이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의 부정적인 모습(인간은 어차피 혼자라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나)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언어 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8년차 언어치료사 김지호가 2007년부터 지난 겨울까지 만났던 아이들 중에서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적은 에세이다.

언어치료사로서 처음으로 말더듬는 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지뢰밭 게임 속 지뢰를 두려움 없이 터뜨리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까지.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의 풍경과 날씨, 첫 인상과 첫 인사, 방안의 소소한 물건까지 기억하며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눈에 보이듯 그려내는 글들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눈물이 차올랐다가, 마지막에는 부디 잘 살아가기는 마음에 이르렀다.

김지호 언어치료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보람을 느끼지만 적지 않은 순간마다 제자리에 머물거 있거나 혹은 뒤쳐진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을 느끼는 순간에도 가장 바라는 것은 "이 아이들이 평범한 아이들처럼 재잘댈 수 있기를 바라며 언어치료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알 수 있다.

스물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 스물 다섯 명을 돌보는 더 많은 가족들이 등장한다.

장애 아동을 둔 가정이 평온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아픈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사이 다른 아이는 소외되는 경험으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아플 수 있다. 돌봄을 담당하는 보호자의 삶은 고달프고 지친다. 장애 아동을 비롯해 보호자, 가족들이 소외되지 않고 서로 지지해야 가정 내의 흔들림은 줄어들고 평온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고민, 불안과 공포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회복할 수 있다."

작가는 아동과 보호자(특히 어머니)가 가족 내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가족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며 언제든지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장애인을 돌보고 있는 가족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가족에게 친구, 이웃으로 범위를 넓혀 공동체의 나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럴 때면 생각하렴,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네가 있다고 말이야.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거야. 말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 역설적이게도 그게 우리가 낯선 이들과 끊임없이 말과 글을 나누는 이유란다. 이렇게 너를 기억하며 편지를 쓰는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야. 우리는 서로 어떻게든 이어져 있단다. 그러니까 외로워 마, 알겠지?

언어가 사는 세계/ 김지호

남들과 다른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신들이 죽고 난 다음 아이가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걱정일 것이다. 복지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운영된다면 그런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김지호 언어치료사는 차등화에 기초한 장애인 지원 정책과 정부가 직접 운영하지 않고 위탁 운영하는 시설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고 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신이의 엄마가 삭발식을 하면서 장애인 지원 정책에 대해 싸우는 현실은 가슴 아팠다. 동시에 우리가 장애를 사회에서 격리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언어치료사로 스물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 곳곳에는 언어로 담지 못할 따스하고 가슴 아린 풍경들이 담겨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힘은 소중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든든한 마음의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읽은 뒤 읽은 책이라서 언어 장애에 대한 의미와 우리가 나누어야 할 과제가 더 크게 다가왔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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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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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구멍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던질 것인가.

만약 그 구멍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찾을까, 찾을 수 없도록 숨길까.

희연이 속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만 구멍을 향해 던진 돌멩이는 잠깐 떠 있다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빨려 들어갔다. 그 뒤로 돌멩이는 다시 볼 수 없었다. 구멍을 향해 던진 모든 것들은 부서지면서 사라졌다. 돌멩이에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구멍을 응시하던 필희도 그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 구멍의 존재를 알게 된 필희의 실종 이후 희연은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품고 살아가게 된다.

필희는 까만 구멍을 골똘히 쳐다봤다. 희영이 던진 돌이 공중에 떠 있다가 가루가 되어 빨려 들어가는 걸 숨죽이고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라졌다. 희영이 던진 돌처럼 감쪽같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미확인 홀/ 김유원



『미확인 홀』은 작고 평온한 마을에 생긴 정체불명의 구멍과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서사는 상실로 인한 상처에 기인하고 있다. 동시에 상처는 상실의 범위를 넓혀간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상처이기에 허공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처럼 위태로운 순간들이 쌓이면서 삶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라진 사람은 아무 말도 없고 남아있는 사람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상실은 고독하다. 깊은 상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얼마 되지 않을 터이니.

은수리에서 처음 미확인 홀을 발견한 희영은 절친 필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필희는 홀에 던진 돌멩이가 사라지는 순간을 오래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실종되었다. 홀로 빨려들어갔는지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필희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의 중요한 것이다.

필희가 사라진 뒤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오직 '사라진' 필희에게 집중되어 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다른 일을 해도 마지막에는 필희의 부재가 당연한 수순처럼 삶의 중심에 고여 있었다. 너무 오래 고여 있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오랫동안 아팠다.

상실에서 오는 상처를 숨기면서 매끈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꾸몄던 희연의 가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블랙홀'이라는 단어가 적힌 쪽지 한장에서 시작된다. 희연에게만 상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연의 남편, 사라진 필희의 동생 필성. 은정의 아빠와 도망친 순옥.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활발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피해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길 것 같은 사람들.

그들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의 상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행복해보이는 얼굴 뒤에도 상실과 상처는 존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삶은 상실로 인한 공동까지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일수록 비어있는 공동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상실을 오래 겪은 사람일수록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속에 호수 밑으로 사라지는 일몰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아파서 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들이 떠올랐다.

필성은 말했다. 매미가 울면 매미를 봐야 한다고.

매미가 울면 매미를 봐야죠. 매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잖아요. 저러다가 미쳐서 죽는 거라고요.

미확인 홀/ 김유원

소설을 읽으면서 필성의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매미의 울음을 탓하기 전에 우는 매미를 봐야 하는데, 다른 이의 상실과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 없이 그 일은 쉽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매미들의 울고 있는데 그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탓하는 소리들만 많은 것 같다. 너무 쉽게 잊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오래도록 겪는 상실은 고독하지만 여럿이 나누는 상실은 덜 고독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을 부수고 빨아들이는 미확인 홀의 존재가 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도록 연결의 고리들이 단단하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미확인 홀』은 희연이 은수리에게 처음 발견한 블랙홀 이후 필희의 실종,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싱크홀과 비슷한 미확인 홀이라는 시작으로 다소 미스터리하게 시작하지만 서사의 내부는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있다. 따뜻한 봄볕 아래에서 펼치면 좋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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