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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 도전하는 만학도. 꿈을 위해 재도전을 아끼지 않는 청년 재수생. 그런 꿈을 후원하는 부모님의 새벽 기도와 응원하는 후배들. 수능장에는 모든 꿈이 응집하고 벌레처럼 뒤섞여 꿈틀거린다. 수능장 철문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어떠한 사정에서도 수험장 입실을 불허한다. 이것은 수능이 가진 '공평한 기회' 이념을 명확히 대변한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고작 철문이 닫혔을 뿐인데 수험장이라는 세계는 마치 이 세계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간인 양 그런 척을 하고, 거의 예외 없이 사람들은 그러한 척의 최면을 신성하게 받들며 의무를 이행한다. 지역 개방이라는 모토가 학교에서 실현되어 감에 따라 아무나 타넘을 수 있는 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애매한 경계를 두고, 철문이 닫혔다는 이유 하나로 바로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수험생의 모습을 생각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능은 마치 더럽고 역겨운 현실에서 인간 실현 최후의 보루처럼 역할 한다. 여기서는 돈도 만능이 아니다. (EBS의 확대 노력은 그러한 차원과 맞물려 돌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은 수능 주변의 시야만을 제공할 뿐, 수능 자체의 체험적 공간에 전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수능은 매번 똑같은 판에 박힌 이야기들이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고 전해져올 뿐이다. 이런 이야기의 극단적인 모습은 수능과 자살이라는 알고리즘이 어쨌든 우선적으로 '안타깝다'는 일반례적인 반응을 통해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여기서 '안타깝다'라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우리의 자세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더구나 그런 안타까운 시선조차도 너무 자주 되풀이되다 보니 '일일이 대응하기에 이제는 지겹다'라는 반응이 "동정은 자살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전문간의 진단으로 채색돼 나온다. 덕분에 사건 자체에 대한 입장이 증발해 버리니 우리가 문제에 신경 쓰는 행동 자체가 어폐가 되어 '아무 문제 없음'으로 일단락된다. 뉴스는 그런 수능 이후의 교실 풍경을 (HD 화질의) 자료화면으로 내보내며 자막으로 "수능 비관... 수험생 자살"을 띄우고 '객관적인' 아나운서 톤으로 내용을 처리한다. 딱한 것도 뉴스까지만이다. 뉴스는 끝났다. 설거지하고 잠이나 자라...


 수능에 실패한다는 것,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얼마든 수능은 재도전할 기회를 열어놓고 있으며, 그 기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얼마나 위선적인 건지 다 안다. 그렇다고 미신이라는 장사가 수능이라는 시장에서 얼마나 활기를 되찾는지 보고서도 그것은 감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수능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쫓는 열망말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탈락은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명문대라는 어른 사회의 언어가 어떻게 '지잡대'라는 질서를 부여했고, 또 그러한 질서를 유희 개념으로 우리가 사용하였는가? 그들은 항상 내 주변에 자리함으로 가시적이어야 한다. 보는 활동으로부터 겪게 되는 주체의 공백이라는 수행적 차원은 다음과 같은 고전적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한다.



 "마지막 시간만은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쌔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과거 우리 학교에서는 수위 아저씨를 'SCV'라고 불렀다. 그것은 집단이 쓰는 은밀한 은어를 수행했지만, 정작 학생 전체가 공유하고 심지어는 수위 아저씨 본인도 어렴풋이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기분 나쁜 것임'을 알고 있는 학교 공통의 감각이었다. 언젠가 수리 때문에 교실로 들어온 수위 아저씨를 보고서 누군가 'SCV good to go, sir'이라고 외치자 조용했던 교실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그리고 거기에 대꾸했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급식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앞에서 귀싸대기를 맞고, 야자가 너무나 지겨워서 '쨌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우리, 스쿨버스에 자리가 없어 서서가면서 까지 졸고 있는 그런 우리였다. 혹자는 학교를 체험 학습의 현장으로 부르는데, 정말이지 맞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학교가 나서서 '금기'로까지 단속하고 있는 이 유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세대 학생이 지나가던 고려대 학생에게 죽빵을 날렸다. 다음 중 누구의 잘못인가?


 1. 선빵을 날린 연대생

 2. 지나가던 고대생

 3. 집에서 자고 있떤 배재대생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재(가 되는 학벌이)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시작하는 것, 이것은 어떤 층위를 말해주는가? 거기엔 이젠 너무나 뻔한 전개가 되어버려 유머인지도 모르겠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한 젊은이가 아주 부유한 삼촌에게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삼촌은 대단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부자가 된 비결을 설명해 주었다. 

 "얘야, 나는 젊은 시절에 무척 가난했지.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내 주머니에는 단돈 1페니 밖에는 없었단다. 난 그 돈을 가지고 우선 과일을 샀다. 그리고 그 과일을 팔아서 2페니의 돈을 만들었지. 다음 날에는 2페니의 돈을 가지고 과일을 사서 다시 10페니에 팔았단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고 나자 내 주머니에는 비로소 5마르크의 돈이 모이게 되었단다. 그 돈을 가지고 다시 과일을 사서 되팔기를 거듭한 끝에 한 달이 지난 후에는 100마르크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단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흘렀단다. 그리고 내 숙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셨어. 그렇게 해서 나는 부자가 되었단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오늘 시대의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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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가 곧 메시지가 되는 시대, 이 시대는 하이퍼 리얼이 리얼리티의 감각을 압도하는 걸 뜻한다. HD 화질로 전해지는 스크린의 고통이 곧잘 ARS으로의 치환되고, 우리는 계좌를 통해 지역적 한계를 우습게 넘나들며 (슈퍼맨처럼) 지구촌 곳곳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가 추구하는 극사실은 부분적인 필름의 전체화라는 한계를 무시한다. '장면'이라는 영역에 참가하지 못한 존재들은 미디어의 차원에서 모두 사라지고, 언어-스크린이라는 맥락에서 얻어진 사실성이 모든 걸 압도한다.



 "맥락에서 분리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몽타주가 고통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억압하고, 반성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을 봉쇄한다. … 질병처럼 상식적 수준에서 개인적 불행과 고통으로 간주되기 쉬운 고통은 시각화될 기회를 비교적 용이하게 얻는다. 이에 사회적·역사적 고통들은 시각적 형태를 획득하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우주로도 갈 수 있는 무려 '현대'라는 시공간에 다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다는 사실로부터 치를 떨었고 분노를 했다. 우리는 분노할 대상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모든 건 사실로써 있는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대판 노예 할아버지가 방영되고 나서 많은 것이 가시화되었고, 덕분에 현실은 덕을 보았다.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접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시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미디어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 소란의 풍파를 지나친 후, 최종 심급인 '얼마나 달라졌는가?'하는 응어리-바로 수수께끼의 '나'가 앙금같이 잔존한다.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내 주변을 조용히 지나치는 '폐지 할아버지'의 소리 없는 찰나는, 침묵이 무언가를 말을 건네 오게끔 한다. 모두가 하기 꺼리는 밑바닥에서의 삶을 살지만, 그런 밑바닥에는 모실 주인도, 지시하고 명령하는 주인도 숱한 익명으로 사라진다. 이 '폐지 줍기'의 충동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 생명이 유지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노예적 충동이자 주인의 목소리는 오로지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만이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로또를 하든지.) 그러나 이 당혹감은 소리 없음으로 해서 포착되지 않는다. 젊은 길거리 옆으로 비켜 나가 폐지를 줍는 노인의 그림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길을 비키지 않아도 된다. 길은 그만큼 넓고, 그들은 알아서 시선 바깥을 찾아 걷는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에서 삶은 전혀 생동감 없는 그림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한편으로 이 글 역시 언어라는 맥락에서 '나'라고 하는 수행적 차원이 공백을 겪고 있음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가 생산한 '씹선비'라는 추궁은 분명히 그런 일면이다. 이 일에 대해서 추궁받고 싶지 않은 그 강렬한 유혹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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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비록 쓰기는 '그대는'이라고 썼지만),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멍청한 질문, 심지어는 촛불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의미조차도 지양하고서 "왜 촛불을 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로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낙관적인 감각이 어떻게 바뀔 수 없는 비관적 표현으로 전환되는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정말 촛불이 아니면 할 게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번 정부에서 부여지는 노골적인 불안-미디어에서 촛불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일면 성공적인 추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촛불이 결국에는 미디어 마사지에 결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자발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촛불이란 행동이 결국에는 결박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적나라하게 (생동감 넘치고 자발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방송 3사의 '배신'이라는 문구는 애당초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여기서 촛불은 문제를 의식하다는 점에서 낙관적이지만, 촛불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최근에 있었던 재보선에서의 '능욕'은 정확히 그 지점을 가리킨다. 정말로 촛불 아니면 할 게 없기 때문에 촛불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확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무기를 드는 순간, 확고함의 명증은 사라지고 폭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응징이 뒤따른다. 목적이 방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목적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촛불의 몫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면, 우리가 경험할 수 없었던 그 무력감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아닌 어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 엇감각에 있을 것이다. 촛불이 내재한 표현 불가능성의 한계를 전복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함-바로 촛불이 사라진 상황이다. 희망은 여기에 없이 저기에 있다. 촛불 바깥을 보아야 한다. 촛불의 밝힘만을 응시해선 안 된다. 촛불의 최면으로부터 촛불의 바깥을 직시해야 한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촛불아 모여라'라는 피켓은 그런 아이러니를 비춘다. 민주당의 피켓-"국정원 대선개입/대통령은 사과하라!"는 얼마나 웃긴가. 해임-OUT-해체. 모두 이뤄질 수 없는 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비극의 원천이다. (이 불가능성은 어떤 차원을 그려주는가? 바로 그걸 행동하는 주체성의 결핍이다. 여기서 우리의 상상이 도달하지 못하는 장면이 드러난다. 그건 바로 수행자인 대통령이 촛불을 드는 것이다.)


 촛불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이 시험에 오르는 것은 바로 촛불이 사라진 시점에서부터 물어진다는 것, 바로 이점에 있다. 문제는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촛불이 '우리 세대'에 던지는 의미는 더 없이 여기엔 희망 없음의 공백을 얘기해 주지 않는가? 모든 정치는 (그리고 지금 이 글조차도) 서울이라는 메트로 폴리스를 필수로 한다. 개인도 양심과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해묵은 실존 신념은 모든 정치를 비극으로 환원시킨다. 교통체증, 분리배출. 이런 질서 차원이 생각하지 못하는 위치를 체감해야 한다.


 (이것이 매우 독단적인 생각이지만) 이제 옳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밤이라는 무대. 흥미롭지 않은가? 정치가 마치 24시 편의점처럼 일대 각성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 되어버렸음은 흥미롭지 않은가? 정치도 핫시스로 버닝해 가며 야자로 해치워야 하는 호모 코레아니쿠스. 프로이트의 문제의식, 꿈을 꾸지만 그런 꿈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점, 그것은 우리의 어떤 층위를 밝혀주는가? 정말 다시 바보같은 질문, "왜 촛불이란 말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면 흥미롭게도 '촛불'이라는 검색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많은 피사체들에서 촛불이 공유하는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밤이라는 무대, 그런 밤을 밝히는 정의로운 불빛, 그리고 횃불처럼 치켜든 촛불. 거리를 불태우는 노이즈된 촛불들,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는 촛불, 전경 앞에 스마트 촛불(?)을 내미는 시위자와 그런 촛불에 입김을 부는 전경 간의 찰나 등. 우리는 여기서 (애써 찾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진) "왜 우린 촛불을 선택했는가?"하는 원천적인 이유가 예외적으로 밀려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렌트는 "… 항상 희망으로 무장했는데, 그들의 그 같은 평가는 옳았던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촛불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촛불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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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 시대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민주화 과정에서는 아주 생명력 있었지만, 정작 민주화라고 하는 추진력이 급격히 사그라지던 '대타협' 시기 이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자리하게 되었다고 역사적으로 말해지는 시점부터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민주화가 됨으로써 '어떤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시대는 민주주의의 공백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시위에서 '국가의 주인은 곧 국민'이라는 권리 장전을 찾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적대자로 설정되는 국가조차도 '권력은 곧 국민으로부터'라는 사탕발림을 애용하고 선전한다. 이러한 단층은 우리 민주화가 어떠한 속성인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논자인 캐서린 문의 지적처럼 "21세기는 비상하게 변화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습, 언어의 다변화, 새로운 노동윤리와 정치적 기억에 적응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 민족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새롭고 다채로운 요구와 의미들이 구축돼야 할 것이다." 이른바 민권의 외침이 인권을 깨우는 것이다. 우리의 타자들, 국민의 변두리가 우리를 명분으로 해서 우리가 예기치도 못한 말을 걸어오는 상황들 말이다.



 "나는 1990년대 후반 이래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어느 이주노동자 보호시설에서 두 명의 한국계 중국인 노동자들 곁에 앉으면서 내가 느꼈던 친밀감과 거리감을 나는 언제고 기억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도움을 찾아 와 있었다. 한 남성은 건설노동을 하면서 수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받고 싶어 했다. 경영자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지불해 주었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지불하지 않은 채 달아나 버렸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얼굴과 두 손, 양팔에 붉은 상흔이 가득했는데, 지하철 터널 안에서 작업 도중 일어난 폭발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많은 치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던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의료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 우리는 물론 한국어로 함께 대화했고, 내가 재미교포라고 소개하자 그는 친밀감과 연대의 제스처를 취하며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사이듯 말했다. '교포에 생활이 … 여기 … 정말 … 서글프죠?'"



 여기서 민주화는 민주주의란 찌꺼기에 어떠한 응답을 해야 하는가?



 인용 전문은 『당대비평』 29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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