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대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민주화 과정에서는 아주 생명력 있었지만, 정작 민주화라고 하는 추진력이 급격히 사그라지던 '대타협' 시기 이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자리하게 되었다고 역사적으로 말해지는 시점부터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민주화가 됨으로써 '어떤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시대는 민주주의의 공백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시위에서 '국가의 주인은 곧 국민'이라는 권리 장전을 찾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적대자로 설정되는 국가조차도 '권력은 곧 국민으로부터'라는 사탕발림을 애용하고 선전한다. 이러한 단층은 우리 민주화가 어떠한 속성인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논자인 캐서린 문의 지적처럼 "21세기는 비상하게 변화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습, 언어의 다변화, 새로운 노동윤리와 정치적 기억에 적응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 민족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새롭고 다채로운 요구와 의미들이 구축돼야 할 것이다." 이른바 민권의 외침이 인권을 깨우는 것이다. 우리의 타자들, 국민의 변두리가 우리를 명분으로 해서 우리가 예기치도 못한 말을 걸어오는 상황들 말이다.
"나는 1990년대 후반 이래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어느 이주노동자 보호시설에서 두 명의 한국계 중국인 노동자들 곁에 앉으면서 내가 느꼈던 친밀감과 거리감을 나는 언제고 기억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도움을 찾아 와 있었다. 한 남성은 건설노동을 하면서 수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받고 싶어 했다. 경영자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지불해 주었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지불하지 않은 채 달아나 버렸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얼굴과 두 손, 양팔에 붉은 상흔이 가득했는데, 지하철 터널 안에서 작업 도중 일어난 폭발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많은 치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던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의료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 우리는 물론 한국어로 함께 대화했고, 내가 재미교포라고 소개하자 그는 친밀감과 연대의 제스처를 취하며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사이듯 말했다. '교포에 생활이 … 여기 … 정말 … 서글프죠?'"
여기서 민주화는 민주주의란 찌꺼기에 어떠한 응답을 해야 하는가?
인용 전문은 『당대비평』 29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