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곧 메시지가 되는 시대, 이 시대는 하이퍼 리얼이 리얼리티의 감각을 압도하는 걸 뜻한다. HD 화질로 전해지는 스크린의 고통이 곧잘 ARS으로의 치환되고, 우리는 계좌를 통해 지역적 한계를 우습게 넘나들며 (슈퍼맨처럼) 지구촌 곳곳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가 추구하는 극사실은 부분적인 필름의 전체화라는 한계를 무시한다. '장면'이라는 영역에 참가하지 못한 존재들은 미디어의 차원에서 모두 사라지고, 언어-스크린이라는 맥락에서 얻어진 사실성이 모든 걸 압도한다.
"맥락에서 분리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몽타주가 고통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억압하고, 반성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을 봉쇄한다. … 질병처럼 상식적 수준에서 개인적 불행과 고통으로 간주되기 쉬운 고통은 시각화될 기회를 비교적 용이하게 얻는다. 이에 사회적·역사적 고통들은 시각적 형태를 획득하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우주로도 갈 수 있는 무려 '현대'라는 시공간에 다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다는 사실로부터 치를 떨었고 분노를 했다. 우리는 분노할 대상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모든 건 사실로써 있는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대판 노예 할아버지가 방영되고 나서 많은 것이 가시화되었고, 덕분에 현실은 덕을 보았다.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접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시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미디어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 소란의 풍파를 지나친 후, 최종 심급인 '얼마나 달라졌는가?'하는 응어리-바로 수수께끼의 '나'가 앙금같이 잔존한다.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내 주변을 조용히 지나치는 '폐지 할아버지'의 소리 없는 찰나는, 침묵이 무언가를 말을 건네 오게끔 한다. 모두가 하기 꺼리는 밑바닥에서의 삶을 살지만, 그런 밑바닥에는 모실 주인도, 지시하고 명령하는 주인도 숱한 익명으로 사라진다. 이 '폐지 줍기'의 충동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 생명이 유지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노예적 충동이자 주인의 목소리는 오로지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만이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로또를 하든지.) 그러나 이 당혹감은 소리 없음으로 해서 포착되지 않는다. 젊은 길거리 옆으로 비켜 나가 폐지를 줍는 노인의 그림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길을 비키지 않아도 된다. 길은 그만큼 넓고, 그들은 알아서 시선 바깥을 찾아 걷는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에서 삶은 전혀 생동감 없는 그림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한편으로 이 글 역시 언어라는 맥락에서 '나'라고 하는 수행적 차원이 공백을 겪고 있음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가 생산한 '씹선비'라는 추궁은 분명히 그런 일면이다. 이 일에 대해서 추궁받고 싶지 않은 그 강렬한 유혹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