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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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 1898~1945)의 <나의 친구들(Mes Amis)>은 빅토르 바통이라는 한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이다. 바통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에 부상을 입고 돌아온 상이군인으로 일자리 없이 군인연금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간다. 

책 제목이 '나의 친구들'이니 바통에게 친구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나의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특히 자기처럼 의지할 곳 없는 '불행한 친구'(p.61)라면 더욱 좋다. 그래야 친구가 자기만을 바라볼테니까.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을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p.37)]


바통은 누군가의 관심을 기대하며 매일매일 밖으로 나간다. 내 생각엔 몸이 불편해도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바통은 일은 하지 않고 친구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 

<나의 친구들>은 이런 바통이 만난 다섯 사람-뤼시 뒤누아, 앙리 비야르, 느뵈, 라카즈, 블랑셰-과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매일 점심을 먹으러 가는 카페에서 그는 여주인 뤼시가 자고 가라고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군중 틈에서 우연히 본 호감이 가는 남자를 뒤따라 가기도 하는데 이 행동에는 그 남자가 자신이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는 망상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싶어 다리 위에 서서 자살할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부유한 사업가가 베푼 호의를 확대 해석하여 (사랑 고백을 하려고!) 그의 딸을 찾아 갔다가 운 좋게 얻은 직장을 잃기도 한다. 모르는 여자가 조금의 관심만 보여도 바로 그 여자와 함께 사는 상상을 하며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여자와 단둘이 있게 되면 불안해지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철저히 혼자인 바통을 보며 처음에는 너무 짠하고 불쌍해 '아 이 사람 어쩌면 좋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책을 계속 읽다 보니 바통의 행동에 어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자신의 외로움을 더욱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슬픔에 가둠으로써 그 상황을 은근히 즐기면서 살아갈 힘과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닌가!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억지로 기운을 내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 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p.50)]


붐비는 기차역을 좋아하는 이유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고 이렇게 외로워 보이는 자신을 사람들이 혹시나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 데 있다. 기차역에서 더 외로워 보이려고 '슬픔에 잠겨 있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을 보며 '아...바통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슬픔에 잠겨 있기 위해 노력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런 내게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외국으로떠나는 열차 안에서 내 생각을 해주기를 바란다. (p.113)]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일자리를 준 라카즈의 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들켜 한바탕 욕을 먹고 혼자 방에 남아 울던 바통이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계속해서 울려고 하는'(p.156) 모습이나, 자살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자살할 것처럼 다리 위에 서서 우는 시늉을 하는 모습도 다 자신의 외로움을 과장하여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은 바통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바통은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불안을 느끼며 그 관계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는데, 이 장면에서 '바통의 진실한 친구는 결국 외로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톨이'라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거리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삶의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니 말이다.

내 생각에 바통은 자신이 원하는 '진실한 친구'를 만나지 못할 거 같다. 외로움에 고통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친구들>은 책의 뒷표지에 쓰여 있는 '대도시에 고립된 현대인의 그늘'이라는 문구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에게 이 세상은 또 다른 전쟁터이지 않을까, 그들이 예전처럼 다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바통은 전쟁에서의 공로로 훈장도 받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봐 주질 않는다. 친구도 전쟁에서 죽어 그는 죽은 친구의 가구를 쓰고 있다. 바통은 분명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겪었을 것이고 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행을 극대화하여 외로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에마뉘엘 보브의 <나의 친구들> 나는 이 소설이 너무너무 좋았다. 작가가 47세에 떠나서 많이 안타깝다. 짧은 생애, 세 편의 소설을 남겼다는데 나머지 소설도 번역되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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