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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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각 이야기는 발표된 시기가 다른데, 책 속 순서대로 <초봄>은 1913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1908년, <종말>은 1914년에 각기 발표되었고 1915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다시 발표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크눌프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험한 노동을 하지 않아 아름다운 손을 가졌고, 걸음걸이는 날렵하며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밝음을 가진 인물이다. '직업도 없는 방랑자로서 불법적이고 비천한 존재'(p.15)였으나, 사람들은 크눌프를 보며 자유를 꿈꿀 수 있고 '집을 즐겁고 밝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방문을 감사해한다.

 

속세의 관점에서 보면 크눌프의 삶은 비루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자유와 방랑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정직함이 있다.

첫번 째 이야기 <초봄>에서 크눌프는 무두장이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남편은 성실하고 아내는 사랑스러우며 집안은 따뜻하다. 겉보기엔 이렇게 안온한 가정이지만 친구의 부인은 남편 몰래 크눌프를 유혹한다. '예절바르고 근사한' 크눌프와 비교해 투박해 보이는 남편에게 화가 난다. 이것이 세속적인 인간 세상의 민낯이다. 친구는 크눌프에게 방랑을 멈추고 한 곳에 정착하라고 하지만 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크눌프는 이런 세상에서 사는게 힘들었을 것이다. 적당히 더러워야 세상살이가 쉬운 법이니까.

 

두번째 이야기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즐거운 청년시절' 여름 한 때 크눌프와 이곳 저곳을 함께 여행하던 '나'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 중 사랑과 우정, 인간의 영혼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 크눌프에게 동의하지 못했던 나는 그가 떠난 후 '고독'이라는 쓰라린 감정을 처음으로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크눌프도 죽기 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의문을 갖는다.

자신의 지난 삶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외롭고 비참할것이다.

하지만 헤세는 크눌프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는다.

크눌프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만난다. 그에게 따진다. 왜 프렌치스카가 떠나고 내가 망가졌을때 날 죽게 하지 않았냐고. 밝고 유쾌한 크눌프에게도 못 이룬 사랑은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이었었던 것이다. 그는 아름다웠던 순간들 보다는 오로지 이루지 못한 프란치스카와의 사랑에만 집착하고 괴로워한다. 하느님은 크눌프에게 그가 잊고 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되찾게 해준다. 또한 크눌프가 많은이들을 웃게 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사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자유를 그리워하게 했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p.134)

 

하느님이 마지막에 묻는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p.135)

 

하느님의 음성은 어머니처럼 다시 첫사랑 헨리에테처럼, 또 다시 두번째 애인 리자베트의 음성처럼 들려오고 그는 편안하게 죽음을 기다린다.

참으로 따뜻한 결말이다. 하얀 눈위에 누워 드디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죽음을 기다리는 크눌프의 모습이 그려진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순간, 이렇게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젠 '잠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끝맺으려 한다.

<초봄>에서 크눌프는 재단사 친구에게 성경이야기를 하며 이런 말을 한다.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난 꼭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p.37)

 

나야말로 헤세의 이 책을 보며 '아름다운 그림책'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도시에 와서 외로워하는 하녀를 위해 건너편 창문에서 휘파람을 불어주는 크눌프의 낭만적인 모습, 친구 부인의 유혹을 피해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재밌는 장면, 젊은 시절 함께 방랑하던 친구와 교회묘지에 누워 이야기 나누는 모습 그리고 수북이 쌓인 눈 위에서 평온히 눈 감는 마지막 모습까지 장면 장면이 따뜻한 그림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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