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낯선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1917~2007)의 책이다. 1987년 발표된 이 작품은 그녀를 세계적으로 알렸고 2003년 프랑스 페미나 상, 2015년 미국에 출간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작가인 '나'와 가정부 사이의 20여년에 걸친 이야기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 첫 장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p.10)

 

내가 죽였다는 고백이 너무 갑자기 튀어나와 놀람과 동시에, '왜 죽였을까?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 동력이었다.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나'는 전업 작가로 전향하면서 집안일을 도와줄 가사도우미가 필요하다. 마침 친구가 한 명의 여성을 추천하는데 그녀가 바로 '에메렌츠'이다. 친구는 추천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돈은 중요하지 않고 그녀가 우리를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나는 에메렌츠와의 첫 만남에서 역시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고용주인 내가 갑(甲)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이것저것 따져보며 갑의 위치에 있다. 마침내 그녀의 시험에 합격한 나는 그녀를 고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에메렌츠는 보통 가정부와는 다르다. 급료는 본인이 일해본 후 결정하며, 근무시간도 들쑥날쑥해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다가 밤 늦게 나타나 새벽까지 청소를 하기도 하고 폭설이 내려 계속 눈을 쓸어야 할 때는 며칠씩 집에 나타나지 않다가 눈이 그치면 와서 밀린 일들을 한다. 하지만 결과는 늘 완벽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해낸다. 그녀는 '노동에서 기쁨을 느꼈고, 노동을 즐겼으며, 일이 없는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잠도 누워서 자지 않고 '연인들의 의자'라 불리는 작은 소파에서 선잠을 자는게 전부다.

한편 아픈 이웃에게 영양식을 갖다 주고  길을 잃고 헤매는 동물들의 주인을 찾아주며 눈이 오면 거의 모든 집 앞의 눈을 쓰는 등 동네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지역 사람들 모두 이런 그녀를 좋아하고 경찰도 그녀를 신뢰한다.

 

그러나 에메렌츠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한다. 근무 시간 외에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과도 일상적인 이야기 외에는 나누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 월급 외에 별도의 사례는 거절, 칭찬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엔 일만하는 그녀가 두려웠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그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등 혼란스럽다.

 

어느 날 남편의 수술로 심란한 나에게 에메렌츠가 따뜻한 와인을 건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세 살도 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 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한 새아버지도 전사, 너무나 사랑하던 쌍둥이 동생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번개에 맞아 검은 숯덩이로 변한 일,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우물에 몸을 던지는 등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일들을 겪은 에메렌츠.

'나'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해준 그녀와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다음날 다시 냉담한 태도의 그녀의 모습에 상처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그녀와 '나'는 20여년이란 세월을 함께 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는다. 에메렌츠가 자신의 특별한 손님을 '나'의 집에서 대접하려다 그 손님이 약속을 취소하자 엄청난 욕설과 분노로 절규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길거리에 버려진 귀가 부러진 강아지 조각상을 집에 들여놨다가 한바탕 난리도 나고, 친구 폴레트의 자살에 에메렌츠가 도움을 준 일 등을 겪으며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 그녀의 감춰진 삶을 조금씩 알게되고 그만큼 감정적으로 가까워진다. 그 가운데 그녀가 왜 침대에 누워 자지 못하는지, 그녀가 한 때 약혼도 했었지만 제빵사였던 그 약혼자는 과꽃혁명 때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에메렌츠 마음의 문은 조금씩 열리는 반면 실제 그녀가 사는 집 문은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의 경찰 수사만 빼고 - 열리지 않고 늘 굳게 닫혀 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다 딱 한 번 '나'에게 그 문이 열린다. 왜 나에게는 자신의 집을 보여줬을까. 그녀의 금지된 세계를 본다는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크리스마스 전날 나는 에메렌츠가 눈을 쓸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TV를 줬고 그녀가 그 선물을 받아들여 너무나 기뻤다. 근데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와서 눈을 쓸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하늘이 우리 얼굴에 그 선물을 내던지기라도 한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쉬지 않고 일하는 그녀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나와 남편.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애써 외면하며 크리스마스의 따뜻함과 달콤함 속으로 빠져든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길 청소에 온 힘을 쏟은 에메렌츠는 심한 독감에 걸린다. 그러나 이제 그만 쉬라는 나의 말에 그렇게 돕고 싶으면 당신 집이나 잘 건사하라고, 눈이 쏟아지는 동안 자신은 눈쓸기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

반면 때마침 나는 문학상을 받으며 작가로서 빛을 보게 된다. 사진촬영, 인터뷰, 거기다 에메렌츠가 없기에 늘어난 집안일을 하느라 매우 분주하다. 병이 깊어진 에메렌츠는 더이상 길에서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틀어박혀 의사는 커녕 자신에겐 '휴식만이 필요할 뿐'이라며 그 누구의 방문도 원하지 않는다. 에메렌츠가 너무나 걱정된 나는 그녀를 돌보기 위해 여러가지 제안을 하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자기를 가만히 놔두라며 누구든지 들어오는 사람은 손도끼로 죽을 수 있다며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점점 절정으로 향하고 두문불출하는 에메렌츠를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그녀를 집에서 나오게 해 병원에 보내려는 '작전'이 계획된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훑어 보면서 에메렌츠가 '나'를 처음 만나 했던 이 말에 나의 눈이 오래 머물렀다.

 

"누구의 것이든 더러운 속옷은 빨지 않아요."(p.15)

 

서양 속담에 "Don't wash your dirty linen in public."이란 말이 있다. 직역하면 남들 앞에서 더러운 속옷을 빨지 말라는 뜻으로 여기서 'dirty linen'은 개인의 내밀한 곳, 밝히지 말아야 할 치부를 뜻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이 있다. 그것이 타인에게 다 드러났을 때 인간은 수치심을 느낀다.

에메렌츠는 남의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이지만 늘 '격식을 갖춘 복장'을 하고 있다.

늘 머릿수건을 쓰고 '검은 소매가 긴 고운 천으로 만든 옷'에 '끈 달린 에나멜 가죽신'을 신는다. 식탁에서 손님들을 접대할 때도 그 모습은 매우 품격있다.

반 인텔리주의자로서 교육받길 거부하고 평생을 노동을 하며 살아왔지만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존엄을 목숨처럼 지켜왔다. 처음에는 이 말이 자존심이 강한 가사도우미의 단순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말이 얼마나 그녀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치부가 있고 그것은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가치관을 말이다.

 

에메렌츠의 삶은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평생을 육체노동을 하며 정직하게 살았고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줌에 있어서도 그들의 가장 소중한 부분은 지켜주고자 했던 그녀는 내가 소설에서 만난 인물 중 가장 품격있는 인물이다.

 

에메렌츠가 평생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그녀의 문이 그토록 오랫동안 닫혀져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녀를 죽게 놔둘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책 속의 화자처럼 책을 읽는 '나'도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당신은 사랑할 줄 모르지요. 나는, 그런데도 어쩌면 당신이 그것을 알 것이라 생각했어요."(p.339)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소통하며 믿는다는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그 어떤 메시지를 이 책은 에메렌츠라는 강렬한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서늘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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