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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코로나...이국적인 맥주 이름이기도 한 이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설마설마하던 것이 2월 말 대구에서 절정을 찍고 나 또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답답하던 차에 이 책을 무작정 사서 지난 달에 읽었다.
이 소설은 페스트에 감염되어 봉쇄된 도시 오랑의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한 르포르타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설 처음에 서술자는 이 작품을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을 다룬 연대기라 말한다.
프랑스 식민지 영토인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에서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한 두 마리만 발견되던 것이 불과 이틀 사이에 '공장과 창고에서 죽은 쥐가 수백 마리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쥐들은 떼를 지어 밖으로 나와 죽기 시작'하고, 그것은 마치 '땅이 쌓여 있던 분비물을 배출하고, 지금까지 안에서 곪고 있던 종기와 피고름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라고 묘사된다. 땅에서 피고름이 올라온다니...잊을 수 없는 끔찍한 묘사이다. 반면에 방역당국은 아무 대책이 없고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재앙이 자기에게 닦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p.51)
결국 1부는 이렇게 끝난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도시가 폐쇄되면서 폐스트는 드디어 '모두의 문제'가 된다. 시민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죄수와 다름 없는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는 혐오스럽고, 미래마저 박탈당한 처지'가 된다.
카뮈는 이런 감옥과도 같은 도시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폐쇄된 도시에서 요양원에 간 아내와 생이별한 채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의사 리외. 아랍인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위해 오랑에 잠시 들렀으나 도시가 폐쇄되어 연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페스트는 악한 사람을 벌하기 위해 신이 내린 벌이라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신의 뜻대로 살것을 강조하는 파늘루 신부. 타지인이지만 보건대를 조직하여 실질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는 타루. 시청의 하급 직원으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건대에서 통계 업무를 맡은 그랑. 열악한 현장에서 혈청 제조에 온 열정을 쏟아붓는 늙은 의사 카스텔. 그리고 이들과는 다르게 페스트를 반가워 하는 인물 코타루.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아수라장이 되자 오히려 살 맛이 나고 한 술 더 떠서 배급물자를 암거래하여 경제적인 이득까지 얻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이다.
의사 리외와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의 싸움에 앞장선다.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많은 도덕가들과는 반대로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한가지,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리외는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한다.
반면에 도시에 갇히게 되어 탈출을 시도하는 랑베르는 리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아요. 내가 아는 한 영웅주의는 어렵지도 않고, 또 영웅주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내가 관심있는 건,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에요. (...) 정말 그럴 수 없다면, 영웅놀이는 그만 두고 모든 사람들이 해방되기를 기다리자고요. 나는 그 이상은 하지 않겠어요." (p.194)
하지만 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내 생각에 리외의 이 말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p.194)
성실성, 그건 바로 '내 직분을 완수하는 것' 이다.
교회 또한 나름대로 페스트와 싸우는 의미로 기도주간을 기획, 파늘루 신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오늘 여러분에게 페스트가 닥친 것은 반성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성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페스트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알고, 고통 속에서도 '영생의 불빛'을 봐야한다는 교회의 전형적인 희망 메세지를 전하며 설교는 끝난다.
전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관념적인 종교관에 매몰된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리외는 받아들일 수 없다.
타루는 이런 리외에게 질문이 많다.
"선생님도 파늘루 신부처럼 페스트에도 나름의 이점이 있어서 사람을 각성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고 여기시나요?", " 선생님은 신도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 헌신적인 이유가 뭔가요?", "무엇에 대해 보호하는 거죠?"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p.153)
리외에게 페스트는 '끝없는 패배'일 뿐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사람은 '죽음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 는 사실이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죽음과 싸우는 것'이다. 랑베르처럼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파늘루 신부처럼 하늘만 쳐다보며 영생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파늘루 신부도 오통 검사의 어린 아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페스트는 죄많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신이 내린 벌이라던 신부에게 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적어도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죠!"
"사랑에 대해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런 세상은 죽을 때까지 사랑하지 않고 거부하겠습니다." (p.255)
페스트가 악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내려진 재앙이라면 이 죄없는 어린 아이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리외의 외침에 파눌루 신부는 손을 내민다. 리외도 손을 맞잡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겪어내고 그것들과 싸우기 위해 함께 있는 겁니다. 보다시피 하느님도 이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난 이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의사와 겸손하고 말 길을 알아듣는(!) 성직자의 맞잡은 손이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파늘루 신부는 두 번째 설교에서 어린 아이가 겪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하늘나라의 영생이 보상해 준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 뛰어들어야' 하며 '오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며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하고,'페스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섬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신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죽음이 필연적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사랑해야 하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심이라고 설교한다.
또한 리외를 향해 영웅주의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던 랑베르도 그토록 바라던 탈출을 앞에 두고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어요. (...)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p.244)
이 소설에서 서술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시청의 하급직원인 조제프 그랑이다. 서술자는 2부에서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보건대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어떤 행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다 보면 결국은 간접적으로나마 악에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되기 때문이다.
타루의 보건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그것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인간에게 그런 행위를 좀처럼 보기 힘들기 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와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상황에서 보건대를 조직하고 혈청을 제조하는데 온 열정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술자는 '영웅적인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랑'을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영웅이라고 칭한다.
위에서 말한대로 리외는 페스트와 싸우는 방법으로 '성실성'을 강조한다. 내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랑은 바로 이런 '성실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시청에서의 업무 외에도 퇴근 후 집에서 글을 쓴다. 비록 한 문장을 가지고 끙끙대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보건대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업무는 아니지만 모든 일을 등록하고 통계를 내는 중요한 일을 한다. 그랑은 이 모든 업무를 해내기에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만 성실하게 해내려고 노력' 한다.
서술자는 이런 그랑을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타루와 리외같이 앞에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과하게 영웅시 하다보면 그랑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간과하기 쉽다. 서술자는 그것이 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재앙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버티고 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우러러 봐야 할 영웅은 없다. 그저 모두가 다 영웅이자 보통 사람들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런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코로나 최전선에서 싸운 의료진들과 방역 당국 관계자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성금과 응원의 목소리들, 자가 방역에 철저하게 임한 국민들 모두가 다 카뮈가 말하는 성실한 사람들이다.
사망률이 감소하면서 도시가 페스트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타루가 쓰러진다. 가장 좋은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그것이 인생이라는 노인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페스트가 사라지는 와중에 덮치는 죽음...인간의 삶은 죽음 앞에서 늘 어색하다.
리외는 다시 찾은 삶에 기뻐하는 군중들과 하늘의 불꽃을 보며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 기쁨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안다.
페스트는 짧은 우리의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타루의 죽음 같은 '삶의 알수없음' 이란 생각이 든다.
타루가 리외에게 한 말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에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