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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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브론테 자매 중 한 명으로 30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작품 <워더링 하이츠>를 지난 달에 읽었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는 저택 이름인 고유명사이므로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명숙 번역의 을유문화사 작품 해설 참조)

 

1818년 영국의 황량한 요크셔에서 태어난 에밀리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언니, 동생과 함께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며 지냈다. 잠깐 기숙학교에 다닌 것을 제외하면 목사인 아버지의 사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낸 것이 전부인 그녀가 이런 폭발할 듯한 사랑의 광기와 그로인한 복수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읽는 내내 놀라웠다. 거의 고립되다시피 살던 병약한 그녀의 내부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황량한 요크셔 지방에 워더링 하이츠 저택의 주인 언쇼에겐 두 자녀가 있다. 힌들리와 캐서린. 어느날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더러운 고아 소년을 데리고 온다. 언쇼는 그 아이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편애한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게 되지만,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서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언쇼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주인이 힌들리로 바뀌면서 히스클리프는 온갖 학대와 모멸을 받으며 하인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지고 둘은 우정 이상의 감정을 키워나가게 된다.

 

반면 근처엔 드러시크로스 저택이 있는데 여기엔 린트 가의 남매인 에드거와 이자벨라가 산다. 어느 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우연히 이 근처에 갔다가 캐서린이 개에게 물려 그 집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게되고 둘은 처음으로 떨어져 있게 된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들짐승처럼 거칠게' 자라던 캐서린은 세련되고 우아한 린튼 가를 접하고는 '매우 정숙한 아가씨'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늘 하나였던 둘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으로서 집안의 유산도 못받고 오로지 남편의 재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에드거의 청혼을 받고 갈등한다. 다음은 청혼을 받은 날 캐서린이 가정부 넬리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어."

 

캐서린이 자신과 결혼하면 격이 떨어질거라는 얘기를 듣고 (끝까지 듣지 않고!)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히스클리프가 갑자기 사라지자 캐서린은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다가 3년 후 에드거와 결혼하고 드디어 안온한 날을 보내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악명높은 히스클리프의 잔인하고도 비열한 복수가 막장스럽게 전개되는 가운데 나는 히스클리프의 이런 복수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꽤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악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힌들리를 시작으로 자신을 천하게 여겨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 캐서린을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갔다는 이유로 에드거를 , 또 에드거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이자벨라에게 접근, 그녀와 결혼하여 죽게 만들고 한 마디로 주변을 생지옥으로 만든다.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히스클리프를 보며 사랑이 변질됐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사랑이란 것이 아름다운 면만 있는게 아님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떠난 캐서린을 향한 분노는 평범한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나를 가만히 둬. 가만히 좀. 내가 잘못했다면 나는 그 때문에 죽는 거야. 그것으로 족하지! 당신도 나를 버리고 가지 않았어? 그러나 당신을 책망하지는 않겠어. 나는 당신을 용서해. 당신도 나를 용서해 줘."

 

자신 때문에 괴로워 하는 캐서린 보다는 캐서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쳤는지 좀 알아달라는 히스클리프의 절규, 그에 맞서 지지 않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소리지르는 캐서린의 외침. 불과 불이 만나 활활 타올라 주변을 다 불바다로 만드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보통 사랑이라 하면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 작품은 사랑의 어두운 면, 가지지 못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그 폭력성을 강렬한 인물들을 통하여 막장스럽게 보여준, 막장 소설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 그 상처를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주고 싶은 마음 누구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선과 악은 늘 가까이 있듯이 이런 사랑의 마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사랑 그 속성이 가진 이런 아이러니함을 휘몰아치듯이 써 낸 에밀리 브론테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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