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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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필립 로스의 책. 지난 달에 읽었는데 이제야 글을 남긴다.

한 노인의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이 책을 다 읽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대학살'이라는 단어였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p.162)

 

 

이만큼 늙는다는 것에 대해 직설적으로 처절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과장같지만 겪어보면 절대로 과장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에 서글프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노년을 바라고 상상한다.

 

 

p.135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안이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있었으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치열하게 살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년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유로운 산책, 일 년에 한 번하는 편안하고 조금은 럭셔리한 여행, 건강을 위한 식단,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취미 생활 등 젊은 시절의 고생을 이런 노년으로 보상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노년에 안정이란 없음을, 진통제로도 듣지 않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 그 누구도 곁에 없음을 깨닫는 그 외로운 순간들. 하루가 다르게 나약해지는 자신의 모습과 매일 대면해야 하는 노년에 안정이란 얼마나 뜬구름 같은 것인지,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겠지' 싶었다.

'안정'이 아닌 모든 것이 '정체'된 노년이라니...

거기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보람보다는 후회로 가득차 있다면 그 상실감과 허망함은 육체의 고통과 함께 노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이란 참으로 가차없구나' 싶었다.

 

 

p.83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주인공이 딸에게 하면서 결국엔 자신에게 했던 이 말이 책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이것이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힘이 되는 말이 아닐지...

 

그러나 이런 주인공도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자신의 수술을 앞두고 한없이 나약한 어린아이같이 온갖 상념에 빠져든다.

 

p.169

그녀는 어떻게 자살했을까? 서울렀을까? 마음이 바뀌기 전에 약을 꿀꺽 삼켰을까? 마침내 약을 먹은 뒤에는 소리를 질렀을까? 죽고 싶지 않다고. 그냥 그 무지막지한 통증과 맞설 수 없었을 뿐이라고.

 

 

'대학살', '정체', '이질감', '통증', '무력감', '고립'...이런 단어들 앞에서 인간이 느껴야하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생각해 본다. 늙고 병드는 건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데, 왜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것일까...

 

세 번의 이혼과 세 자녀를 둔 주인공. 가정파탄의 원인은 늘 그에게 있었다.

세 자식의 행복한 유년을 빼앗고, 아내들에겐 배신감과 상처를 줬으며 능력있고 따뜻한 형에겐 질투심까지 느껴 사이가 멀어지게 한 조금은 찌질한 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늙은 나이에 또 다시 수술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곁에 있어줄 사람을 생각하다가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그로 인한 가책에 가슴을 치며 절규한다. 자신은 아버지에게 어린아이로서 받아야 할 사랑과 보호를 다 받았으면서 왜 자신은 내 자식들에게 그러지 못했는지 처절하게 뉘우친다. 늙고 아픈 가운데 느끼는 처절한 외로움, 게다가 그 외로움이 지난 날 자신의 과오로 생겨났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수치심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p.165

한번 용기를 내어 부탁해볼까? 다짜고짜 형한테,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 좀 해보는 동안 그 별채에서 두어 달 지낼 수 있냐고 물어볼까? 수술을 받은 뒤 회복기에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형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내 주위에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을 그려본다. 가족, 친구들, 소소한 모임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들...모두가 이런 보통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니 연민이 느껴진다.

죽음을 앞 둔 외롭고 슬픈 노년의 삶을 버티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함을 느낀다.

나중에 홀로 남은 노인이 되었을 때 '내 삶이 그래도 '보통'은 되었지' 라고 생각하며 눈감고 싶다.

 

다시 한번 읽어본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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