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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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소설, 일명 퀴어 소설이라고도 하는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작년에 2018년 풀리처상 수상작인 <레스>가 내가 읽은 유일한 성소수자 소설인 듯 싶다. 그 외에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작년에 사두긴 했는데 아직 읽지 않았고, 우연히 작년 말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 책이 두번 째 퀴어 소설이자 2019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되었다. 당시 난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을 도서관에 서서 읽다가 그만 빌려와서 다 읽고 말았다. 책 뒷표지에 수필가 김하나의 작품평 중 '당신이 결코 할 수 없을 한가지는 이 이야기들을 읽다 마는 것'이라는 말이 적중한 셈이다.

 

이 책은 4편의 중단편을 모은 연작 소설집으로 이 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으로 작가는 2019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4편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1인칭 시점으로 화자는 작가이자 게이이다. 성도 박씨이고 이름도 '영'인데, 박상영 작가과 겹쳐지면서 더욱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심각한 상황인데 어쩌면 이리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성'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에 불편하다가도 대도시 하늘에서 홀로 외롭게 반짝이는 별과 같은 그런 문장과 만날 때면 누군가는 잔잔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구나...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 <재희>는 게이인 '나'와 '정조 관념이 희박'한 재희와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20대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두 사람을 보며 웃지만, 재희의 결혼으로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끝났음을 깨닫는 마지막 '나'의 모습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암투병 중인 엄마를 간병하는 화자에게 5년 전 사귀었던 '형'으로부터 편지가 오면서 시작된다. 띠동갑이었던 형이 보여줬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과 위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해버릴 정도로 좋아했'던, "사랑, 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라는 잔인한 말과 함께 떠난 '형'의 편지는 현실의 나를 온통 흔들어 놓는다.  '나'는 실연의 고통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기도를 한 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p.169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또한 동성애는 정신병이라며 '나'를 정신병원에 가뒀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런 엄마에게 사과받고 싶고 또 용서하고도 싶지만 화해를 향해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나'의 감정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P.179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 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받아들여지길 바라지만 끝내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엄마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이란게 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갈 수도 있음을, 피가 섞여 누구보다 잘 알거라 믿었던 존재가 어쩌면 가장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바라보고 결국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일 뿐임을...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나'와 규호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나'는 한 동안 만나던 파트너의 부주의로 HIV에 감염되지만 자신의 병에 '카일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내가 나이며 동시에 카일리' 라며 HIV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런 '나'에게 먼저 사귀자고 하는 규호와 사실대로 말하는 '나'. 그리고 결국엔 사귀게 되는 '나'와 규호.

나중에 '나'는 규호에게 묻는다. 카일리가 있는데 왜 선뜻 나와 사귀기로 했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카일리를 갖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규호의 이 한 마디는 그동안 사랑의 쓰고 달콤함을 두루 겪은 나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규호와 헤어진 내가 홀로 지내다 방콕에 가는 이야기이다. 규호와 방콕에서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상실감과 외로움에 눈물을 흘린다. '나'와 규호의 사이엔 '순도 백 퍼센트'의 어떤 특별함이 있었다고  글로 증명하고 싶어 계속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소설 속 규호와 현실의 규호는 점점 멀어짐을 느낀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 그 공허함 속에서 그래도 나는 멈출 수 없음을, 대도시에서 사는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 소설집은 주인공 '나'가 대도시라는 크지만 그만큼 개인의 존재는 미미한 공간에서 성소수자로서 겪는 삶, 사랑과 이별, 가족과의 갈등 등을 경쾌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와 스토리의 막장스러움에 놀라기도 하고 살짝 엿본 게이 문화가 낯설기도 했지만 이런 나의 반응이 이제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세상임을 안다. 

요즘 워낙 핫한 작가라 호기심에 읽어봤는데, 가벼우면서 강렬했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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