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아주 아주 옛날에 읽은 이 소설은 매사에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그러나 마음은 여린 한 소년의 방황과 성장을 담은 그런 소설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지켜주고 싶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사회에 적응 못하는 소년의 이야기라고...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은 이 작품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른이 되는 문턱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현실을 부정하고 반항하는 홀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순수라는 가치를 향한 편집증적인 집착이 단순히 사춘기 소년의 방황이 아니라 한 여리고 순수한 인간의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다. 

속임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겪으며 이 세상과 순수성은 공존할 수 없음에 좌절하고 슬퍼하는 그러나 그 표현이 서툰 한 소년의 외침.

그런 홀든을 앤톨리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p.276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걸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단념해버리는 거야. 실제로는 찾으려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단념해버리는 거야."

 

 

홀든은 말할 때 마다 험한 욕을 하며 행동은 충동적이고 거짓말도 술술 잘 하는, 매사 시니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반항기 가득한 소년이다. 그러나 문학을 좋아하고 눈을 뭉쳐 차에다 던지려다가도 차가 너무 하얗고 깨끗해 차마 던지지 못하고, 친구의 값싼 가방과 자신의 비싼 가방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고 울적해 하며, 매춘부의 옷을 옷장에 걸어주며 그녀가 그 옷을 살 때 누구도 그녀가 창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임을 생각하며 서글퍼하는 그런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16살 소년이 할 수 있을까...나는 놀랐다. 그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못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의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홀든의 이런 점보다는 그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반항아로만 생각됐었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홀든의 배려심과 감수성, 연약함, 공감능력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런 홀든이 2박3일 동안 뉴욕 여기저기를 다니며 극심한 외로움을 겪고 좌절하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동생 피비를 보러 간다. 피비는 오빠가 또 다시 퇴학당했음을 알고 장차 오빠가 되고 싶은 것을 말해보라고 다그치는데 그 때 홀든은 그 유명한 말을 한다.

낭떠러지 옆에 서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은 홀든은 피비가 다니는 학교에 갔다가 벽에 써 있는 욕을 보고 분개 하며 낙서를 지우지만 그런 욕이 다른 곳에 칼로도 새겨져 있고 박물관 같이 은밀한 장소에도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낙담한다. 그리고 백만 년을 지우러 다닌다 해도 온 세계의 욕을 반도 지울 수 없을 것임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p.309

아이들은 모두 공짜로 한 번 더 타기 위해 황금의 링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비도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나는 피비가 그러다가 목마에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어린애들이 황금의 링을 잡으려 할 때는 그냥 내버려두고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다.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파수꾼 'catcher'가 되고 싶다는 홀든이 2박3일의 방황을 마치고 사랑하는 여동생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하는 장면이다.

세상의 모든 욕을 지우고 다녀도 다 지울 수가 없듯이 언젠가는 어른이 될 아이들을 영원히 지켜줄 수는 없음을, 이는 곧 catcher가 될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은 될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임을 깨달은 것이리라.

 

세상에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순수한 아이들도 결국엔 어른이 되고 세상의 더러움에 때가 묻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때를 덜 묻히기 위해 상대방을 더 사랑하고 믿으며 존중하고, 아픔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답게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피비가 오빠인 홀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홀든을 구했듯이 반드시 어른만이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슴에 따뜻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홀든이 생각하는 catcher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홀든은 그렇게 어른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놓는다. 그런 홀든의 모습이 두 번째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매우 감동적이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 또한 노력 해야 겠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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