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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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왠지 읽어야만 할 거 같은 책 <설국>을 드디어 읽었다. 이걸로 만족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자칫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 싶은, 그야말로 분위기가 지배하는 소설이다. 참 이상한게 야한 장면은 한 번도 안 나오는데 왜이리 에로틱하고 퇴페미까지 느껴지는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묘사한 부분. 발가락, 목덜미, 거머리, 양파 구근, 깨끗하다...이런 단어가 감각을 자극한다. 특히 '깨끗하다'는 표현은 잊을만 하면 나와 작가가 청결에 좀 병적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p.19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p.31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다소 콧날이 오똑한 둥근 얼굴은 그저 평범한 윤곽이지만 마치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에다, 목덜미도 아직 가냘퍼, 미인이라기보다는 우선 깨끗했다.

 

p.36

여자가 샐쭉해서 고개를 숙이자,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고 등줄기까지 붉어진 것이 보여 흠뻑 젖은 알몸을 고스란히 내놓은 것 같았다.

 

p.65

백합이나 양파 구근을 벗겨낸 듯한 새하얀 피부는 목덜미까지 은근히 홍조를 띠고 있어 무엇보다 청결했다.

 

서사가 풍부한 작품을 좋아하는 나에겐 좀 심심한 내용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잔잔함 속에서 묘한 재미가 느껴져 계속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다만 문장에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의미를 놓칠까봐 일부러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좀 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 책을 덮고 난 후 든 생각이다.

 

이야기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라는 너무나 유명한 첫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펼쳐지는 하얀 세상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도쿄에 사는 시마무라라는 남자가 눈의 고장 니가타 현의 한 온천장을 방문하면서 거기서 만난 고마코라는 게이샤와 요코라는 여자 사이에서 묘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와 함께 표현한 작품이다.

 

고마코는 이 소설에서 가장 생생한 인물이다. 시마무라를 사랑하지만 시종일관 방관적 자세로 있는 그를 보며 홀로 애타하면서도 늘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인이다. 늘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시마무라, 소설 첫 부분 기차 안에서 시마무라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이미지 외에는 어떤 여자인지 알길 없는 요코와는 다르게 고마코라는 인물은 이 소설을 살아있게 하는 생명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요코 또한 고마코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진 않지만 스승의 아들 유키오를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그가 죽은 후에도 매일 묘에 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한 사람을 향한 그녀의 진실된 사랑만큼은 요코라는 인물 자체보다 더 강렬하게 소설 속에서 부각된다.  이런 고마코와 요코는 방식은 다르지만 소설 속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시마무라의 삶은 어딘가 병약하고 허무하며 보는 사람을 기운빠지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마코와 요코가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시마무라가 맞다. 어차피 죽음으로 끝날 우리의 삶이란 허무하다. 사랑도 언젠가는 끝나고 열심히 살아봤자 어차피 죽으면 끝인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뭐할 것인가?

 

p.55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 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사실을 고마코도 알고 요코도 안다.

책을 읽고 책에 관한 메모를 해두는 고마코에게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 있나?"라고 말하는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도 "소용없죠" 라며 응수한다. 그러나 한 번 더 헛수고라고 확실히 말하려는 순간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에게 매혹당한다.

 

p.39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란 어디서 봐도 허무하다. 사랑의 열정, 좀 더 나은 앞날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 타인에 대한 나의 희생 등 모든게 다 소용없는 헛수고이다.

이것을 고마코나 요코도 모를리 없다. 하지만 그런 삶의 허무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하기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삶의 자세가 고마코와 요코에겐 있다. 삶을 긍정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그녀들이 하얀 눈을 배경으로한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시마무라가 현실을 떠나 눈의 고장으로 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줄 알면서도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려는 사람에게 눈과 같은 순수함과 계절의 변화와 같은 생명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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