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소멸
결국 긴 토론 끝에 마을은 코끼리를 인수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교외 주택가였기 때문에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비교적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고 마을 재정도 넉넉했다. 게다가 갈 곳 없는코끼리를 인수하는 데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확실히 사람들은하수도를 정비하거나 소방차를 사는 것보다는 늙은 코끼리 쪽에호감을 가졌다.

요컨대 곤혹과 고통스런 수사법으로 넘치는 신문기사를 종합해 추측해볼 수 있는 사건의 결론이랄까 본질은 하나밖에 없었다. 즉, 코끼리는 달아난 것이 아니라 소멸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내가 어쩌면 그 사라진 코끼리의 최후의 목격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신비한 광경이었다. 통풍구로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그 축사 안에만 서늘한 감촉의 다른 시간성이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코끼리와 사육사는 자신들을 둘러싸려는 - 혹은 이미 일부 둘러싼 그 새로운 체계에 기꺼이 몸을맡긴 듯이 보였다.

패밀리 어페어
세상에는 그런 일이 흔히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동생의약혼자가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런 남자와 결혼할 결심을 한 여동생에게 적잖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실망스러웠다.

 "오빠는 모든 사물의 결점만 찾아내서 비판하지,
좋은 점을 보려고 하지 않아. 뭔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일절 손도 대려 하지 않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런 게 얼마나신경에 거슬리는데,

나는 한 번 더 사진을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세상에 딱보고 싫어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게다
가 그 컴퓨터 엔지니어는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싫어했던 동아리 선배와 분위기가 똑같았다.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머리가 텅비고 고집스러운 남자였다. 게다가 코끼리처럼 기억력이 좋아서사소한 것을 언제까지고언제까지고 기억했다. 머리가 나쁜 것을기억력으로 때우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아. 먼저 백포도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큰 글라스에 백포도주와 얼음을 넣고, 거기다 페리에를 섞고 레몬을 짜넣으면 아주 좋지. 난 주스 대신으로 마시지만."

건전한 생각이야, 하고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너 덕분에 이제 우리집에도 땜질 인두가 하나 생겼다. 하지만 그 땜질 인두 탓에 그곳은 이제 내 집이 아닌 것 같다.
아마 그건 내가 속이 좁은 탓일 것이다.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쌍둥이와 헤어진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에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잡지에서 발견했다.

"자동응답 전화를 사는 게 어떻겠냐고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그건 싫어." 나는 말했다. "온기가 없잖아."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 리얼리티라고 생각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회전하고, 달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는 것 같은 유의리얼리티.

만약에 - 나는 가정했다 - 어딘가에서 쌍둥이와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자. 그다음에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한 번 더 같이 살지 않을래, 하고 그녀들에게 말해보는 게 좋을까?
그러나 그런 제안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그녀들은 이미 나를 통과해버렸다.

여자가 뿌린 오드콜로뉴의 진한 향기 탓인지도 모른다. 그 향기는 마치 미묘한 날벌레처럼 나의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와 내 세포를 늘였다 줄였다 하고 있었다.

"그 꿈을 꾸는 시간은 늘 대체로 정해져 있어. 새벽 네시나다섯시 - 해가 뜨기 직전이야. 땀에 흠뻑 젖어서 벌떡 일어나면아직 주위는 어둑해. 그렇다고 완전한 암흑은 아냐. 그런 시간이야. 물론 어떤 꿈이나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 

세세한 부분은그때마다 하나하나 달라. 상황도 다르고, 역할도 달라. 하지만기본적인 패턴은 같아. 등장인물도 같고, 결말도 같아. 저예산의시리즈물 영화처럼."

그것을 상실한 지 대체 몇 년이 지났을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상실한 해를 기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쌍둥이가 내 곁을 떠나기 훨씬 전에 이미 상실한 것이다.
쌍둥이는 내게 그것을 일깨워주었을 뿐이다. 

상실한 뭔가에 대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것을 상실한 날짜가 아니라 상실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은 날짜뿐이다.

1. 로마제국의 붕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후 두시 칠분이다.

그때 나는 평소처럼 - 즉, 평소 일요일 오후에 그랬던 것처럼 - 주방 식탁에 앉아 방해되지 않는 음악을 들으면서 일주일분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날마다 일어난 일들을 간단히 메모해두었다가 일요일에 그것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나의 오랜 습관이다.

목요일 페이지에는 대충 그런 내용을 적었다. 80퍼센트의 사실과 20퍼센트의 성찰이 내 일기 쓰기의 방침이었다.

비가 올 확률은 완전히 제로 퍼센트였다. 기상도를 보는 한 그것은 전성기의 로마제국처럼 평화로운 일요일이었다.

2. 1881년의 인디언 봉기
전화벨이 울렸을 때, 시계는 두시 삼십육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빌어먹을, 나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일기를 계속 썼다.
서둘러 마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아니, 틀렸다. 그렇지 않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은 1939년9월 1일의 사건이다. 어제의 일이 아니다. 

4. 그리고 강풍세계
지난주 일기를 전부 쓰고 난 뒤, 나는 레코드 선반 앞에 앉아서 강풍이 미친 듯이 부는 일요일 오후에 들음직한 음악을 골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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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빵가게를 습격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참을 수 없을 경도의 공복감이었다. 시각은 새벽 두시 전이었다. 나와 아내는 여섯시에 가볍게 저녁을 먹고, 아홉시 반에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시간에 둘 다 동시에 잡이깨버렸다. 

잠에서 깨고 잠시 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맹렬한 회오리처럼 공복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공복감이었다.

특수한 굶주림이란 무엇인가?


① 나는 작은 보트를 타고 조용한 바다 위에 떠 있다. ②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속에 해저화산의 꼭대기가 보인다. ③ 해면과그 꼭대기 간의 거리는 별로 멀어 보이지 않지만, 정확한 것은모른다. ④ 왜냐하면 물이 너무 투명해서 거리감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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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빵가게 재습격 
코끼리의 소멸
패밀리 어페어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
로마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 그리고 강풍세계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빵가게 재습격
빵가게를 습격한 얘기를 아내에게 한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마 그건 옳으냐 옳지않으냐 하는 기준으로 판딘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요컨대 세상에는 옳지 않은 선택이 옳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옳은 선택이 옳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 - 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지 -를 회피하려면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고,대체로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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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전신같은 단편 반딧불이가 실려있는, 단편집 반딧불이.
하루키의 단편보다 장편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 반딧불이 단편집은 개인적으로 아끼는 단편들이 담겨있다.

사촌동생은 오른쪽 귀가 좋지 않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공에 심하게맞았는데, 그후로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러렸다. 이에 들리지 않는 건 아니고 어슴푸레하게는 들린다. 또 비교적 잘 들리는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다. 그리고 이주 드물게 양쪽 다 전혀안 들릴 때도 있다. 

그 애의어머니, 즉 내 고모의 말에 의하면 신경성 같은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양쪽 귀의 신경이 균등하게 작용하다가도 때때로 오른쪽의 침묵이 왼쪽 소리를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침묵이 기름처럼 오감을 뒤덮는다.

"그렇지, 뭐." 사촌동생이 말했다. "게다가 무서워, 사실은, 아픈 게 싫어. 진짜 아픔보다 아픈 걸 상상하는 게 더 고통스러워.
그런 거 이해가 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거야. 그러니까, 나 아닌누군가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걸 옆에서 내가 보고 있잖아. 그럴때 나는 타인의 아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 그렇지만 그렇게 상상하는 통증이란 건 정말로 그 누군가가 경험하는통증과는 또다른 걸 거야.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 아픔이라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니까."

그해 봄, 이런저런 진절머리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나는 그때까지 이 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도쿄를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왼쪽 귀를 내 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묘한 감동이 일었다. 아주 옛날에 들었던 빗소리처럼, 그애의 어색하게 과장된 일거수일투족이 내 몸에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친척들이 왜 나와그를 묶어서 생각하려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 지금과 똑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넓은 잔디밭이 있고, 바다가 보이고, 테니스 코트가 있고, 토끼와 산양이 있고, 쌍둥이 여자아이가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는.… 이런 풍경 말이다. 그러나 물론 착각이었다. 

담배를한 개비 다 피운 다음에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아까 느낀 기시감은 머릿속에 여전히 또렷이 남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지금, 이렇게 둘이 있는 게 말이야."
"이상하지 않은데." 내가 말했다.
"이상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그는 말했다. 

"그래도 뭔가이상하단 느낌이 들이."
"예를 들면 어떤 게?"
친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지만 장소나 시간 같은거. 분명 그런 걸 거야."
팔 년 전의 일이다. 그 친구는 이미 죽어서, 지금은 없다.

내 기억력은 이제 완전히 잠들어버렸다. 술렁거리는 소리가낮게 깔린 연기처럼 내 눈높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때때로 내 머리는 아주 단순한 일로 혼란스러워진다. 사람들은 왜 아픈가, 뭐 그런 생각들로, 아주 조금 뼈가 어긋난 것, 커속의 뭔가가 살짝 일그러져버린 것, 어떤 기억들이 불규칙하게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 

사람이 아픈 것, 병이 몸을 침범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돌이 신경 틈새로 파고들고, 살이 녹고, 뼈가 드러나는 것. 그리고 그녀의 파자마 주머니에 들어 있는 싸구려 볼펜 한 자루,
볼펜.

그녀는 언덕을 그렸다. 복잡한 모양의 언덕이었다. 고대사의삽화에나 나올 듯한 언덕이다. 언덕 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집 주위에는 장님 버드나무가무성했다. 장님 버드나무가 여자를 잠재운 것이다.

"내가 만들었어." 그녀가 말했다. "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를묻힌 작은 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여자를 잠재우는 거야."

장님 버드나무는 진달래 크기 정도의 나무였다. 꽃은 피지만, 그 꽃은 두꺼운 잎에 싸여 있었다. 잎은 녹색으로 도마뱀의 꼬리가 잔뜩 모여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잎이가늘다는 것만 빼면 장님 버드나무는 조금도 버드나무 같지 않았다

‘장님 버드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지만, 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어."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수령에 도달하면 장님 버드나무는 위로 자라는 걸 멈추고 아래로 아래로만 뻗어가. 그래서 어둠을 양분 삼아 자라."

 눈을 감고 짝 하고 손뼉을 치고 다시 눈을 뜨면 여러 상황들이 바뀌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바람이 내 피부에 달라붙은 여러 가지 존재감 위에 이상한 줄질같은 걸 하는 탓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훨씬 더 옛날에는 곧잘이런 느낌을 체험했다.

"존 포드의 리오그란데의 요새〉라는 영화 본 적 있어?" 사촌동생이 뜬금없이 물었다.
"아니. 나는 대답했다.

나는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뿜었다.
"그러니까,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라는 건가." 내가 말했다.
"그럴까?"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귀 때문에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때마다 난 언제나 영화의 그 장면을 떠올려. ‘인디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디언이 없다는 여깁니다‘ 라고 말하는"

"똑같은 곳을 똑같이 휘저어버리니까, 지금은 어쩐지 닳아버린 기분이야. 내 귀란 느낌이 안 들어."

세 가지의 독일 환상
1. 겨울 박물관으로서의 포르노그래피
섹스, 성행위, 성교, 교합, 그밖의 뭐라도 좋지만, 그런 말, 행위, 현상에서 내가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거울 박물관이다.
- 겨울의 · 박물관

나는 - 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 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풍로며 냉장고며 칫솔 같은 것들은 유서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근처전파사나 잡화점에서 사온 것들이지만, 박물관 안에서는 그런것조차 어딘가 박물관적으로 보인다. 우유조차 고대의 소에서짜낸 고대의 우유처럼 보인다. 

나는 가끔 헷갈리고 마는데, 이건박물관이 일상을 침식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일상이 박물관을 침식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누구를 이해하는 것도 멈춘다.

누군가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고, 문 앞이 어떻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나는 섹스를생각하면 언제나 겨울 박물관에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 고아처럼 웅크리고 앉아 온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스 팬은 주방에, 쿠키 상자는 서랍에, 그리고 나는 겨울 박물관에 있다.

2. 헤르만 괴링 요새 1983
헤르만 괴링은 베를린 언덕을 파내어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말 그대로 언덕을 통째로 파내어 그 내부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발라버렸다. 

3. 헤어 W의 공중정원
내가 처음으로 헤어 Her W의 공중정원에 안내받은 것은 안개짙은 11월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헤어 W는 말했다.

그런 이유로 헤어 W의 공중정원은 베를린의 6월을 기다리면서, 지금도 크로이츠베르크의 상공에 15센티미터만 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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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것에 아주 탁월했다. 약간 냉소적인 성향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도그녀에게도 똑같이 농담을 하며 놀렸다. 

어느 한쪽이 침묵하고있으면 이내 그쪽에 말을 걸어 능숙하게 상대의 얘기를 이끌어냈다. 그에게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 그는 별로 재미없는 상대의 얘기 속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몇 가지씩 찾아내는 신기한 재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내가 무척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화를 냈던 것은 그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지만, 그 기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상황을 바꿔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한번 일어나버린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져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그날 밤 차고 안에서 죽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표현하고 보니 역겨우리만큼 평범하다.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을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붙잡는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라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생각 같았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나 그녀나 원래는 열여덟과 열아홉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옳을 듯했다. 열여덟 다음에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이 열여덟 - 그건 이해된다. 그러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도 오는 겨울에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언제까지나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얘기는 그리 길게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얘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말의 가장자리가 잡아뜯긴 모양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얘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이으려 했지만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조금벌린 채 멍하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불투명한 막을거친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무척 나쁜 짓을 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불확실한 세계의 어딘가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안녕.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도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이었다.
 나는그런 기분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에다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하는 말들은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올 곳은 없었지만,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 야구 중계를 켜놓고그걸 보는 척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나눠진 공간을 또 둘로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계속하다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달 말인가. 내 룸메이트가 인스턴트커피 병에 넣은 반딧불이를 주었다. 병 속에는 반딧불이 한 마리와 풀잎과 물이 조금들어 있었다. 뚜껑에는 작은 공기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주위가 아직 밝아서 그것은 그저 물가의 검은 벌레로밖에 보이지않았다.

병 속에서, 반딧불이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약했고, 그 색은 너무도 엷었다. 내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좀더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의 어둠 속에 뿌렸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조금 앞에 있었다.

헛간을 태우다
그녀와는 아는 사람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친해졌다. 삼 년전의 일이다. 그녀와 나는 열두 살 가깝게 나이 차가 났다. 그녀는 스물이고 나는 서른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얘기를 하면서 거의 무의식걱으로 그 귤껍질 까기‘를 계속했다. 점점 내 주변에서 현실감이 흡수되어리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묘한 기분이다. 

옛날에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재판을받을 때, 밀실에 가두어 조금씩 공기를 빼는 형벌이 어울린다고했다고 한다. 결국 어떤 처형 방법을 택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나는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의 대부분은 백 퍼센트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멀리 흐르는 구름을 바라볼 때처럼 아주 아련해지고 기분이좋았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내가 물었다. 잠깐 멍하니 있었던 탓에 잘못 들은것 같았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반복했다.

"헛간 이야기를 듣고 싶군." 내가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다운 것이 없었다.

간단한 이야깁니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이 붙은 성냥을 던지는 겁니다. 가만 놔두고, 그게 끝이죠. 다 타는 데 십오 분도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말했다. "남의 헛간을 태운단 말인가?"
"그렇죠." 그는 말했다. "당연히 그렇죠. 그러니까 말하자면범죄행위죠. 당신과 제가 지금 이렇게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처럼,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어째서 내게는 말하는 거지?"
그는 왼손 손가락을 곧게 펴더니 자기 볼을 문질렀다. 조금 자란 수염이 메마른 소리를 냈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인간의 행동양식 같은 걸 잘 알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저는 소설가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얘기한겁니다."

정말이지 완전히 버려진 헛간이다. 선로를 향해 펩시콜라의 양철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그런 것을 건물이라고 불러야 할지자신이 없지만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그가말한 대로, 누군가 태워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리고 있다. 우리집 근처의 헛간은 여전히 한 곳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헛간이 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또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춤추는 난쟁이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나더러 춤을 추지 않겠냐고 했다.
그것이 꿈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꿈속에서도 나는 몹시 지쳐있어서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못 추겠는데" 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난쟁이는 그 일로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난쟁이는 혼자서 춤을 추었다.

나는 정성껏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 빵을 굽고 커피를 끓였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화장실 모래를 바꿔주고 넥타이를매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갔다. 코끼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 혁명이 일어난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춤추는 난쟁이만은 아직 사람들 앞에서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얘기야. 그러니까 남들한테는 말하지마. 내 이름도 말하지 마. 알았지?"

15번 작업대에서 발톱을 붙이고 있는 여자애는 아주 날씬하고 중세시대 회화에 나오는 소녀 같았다.
"실례합니다."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제복을보고, 발 언저리를 보더니, 다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모자를벗고 먼지막이용 안경을 벗었다. 확실히 대단한 미인이었다. 

"내가 네 몸속에 들어가. 그리고 무도장에 가서 여자를 유혹하고 춤을 춰서 꼬드겨. 그래서 그녀를 네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동안 너는 한 마디도 입을 떼서는 안 돼. 소리를 내서도 안 돼.
여자를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만약 소리를 낸다면?" 내가 물었다.
"그때는 내가 네 몸을 가질 거야. 난쟁이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고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지옥에서 끄집어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결국 소리치지 않았다. 거의 직관적으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것은 난쟁이가 벌이는 단순한 속임수다. 난쟁이는 내게 소리를 지르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한 번이라도 소리를 내면 내 몸은 영원히 난쟁이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게 바로 난쟁이가 원하는 바다.

"너의 승리야." 난쟁이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네 거야. 나는 나간다."
그리고 난쟁이는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건 아냐." 난쟁이는 말을 이었다. "넌 몇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야. 네가 한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

그 대신 영원히 숲속에서 춤을 추게 되겠지?" 나는 묻는다.
"당연하지." 난쟁이는 말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네가직접 결정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난쟁이는 킬킬 웃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등을 쭉 펴고 눈을 감자, 바람 냄새가 났다. 과실처럼 풍요로움을 품은 바람이었다. 거기에는 까칠한 껍질이 있고, 과육의 끈적거림이 있고, 씨앗의 도톨거림이 있었다. 과육이 공중에서 터지자 씨앗은 부드러운 산탄이 되어 내 맨팔에 박혔다. 그리고 그뒤에는 미미한 통증이 남았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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