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런 것에 아주 탁월했다. 약간 냉소적인 성향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도그녀에게도 똑같이 농담을 하며 놀렸다.
어느 한쪽이 침묵하고있으면 이내 그쪽에 말을 걸어 능숙하게 상대의 얘기를 이끌어냈다. 그에게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 그는 별로 재미없는 상대의 얘기 속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몇 가지씩 찾아내는 신기한 재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내가 무척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화를 냈던 것은 그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지만, 그 기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상황을 바꿔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한번 일어나버린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져없어지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을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붙잡는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라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생각 같았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나 그녀나 원래는 열여덟과 열아홉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옳을 듯했다. 열여덟 다음에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이 열여덟 - 그건 이해된다. 그러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도 오는 겨울에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언제까지나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얘기는 그리 길게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얘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말의 가장자리가 잡아뜯긴 모양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얘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이으려 했지만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조금벌린 채 멍하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불투명한 막을거친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무척 나쁜 짓을 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불확실한 세계의 어딘가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안녕.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도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이었다. 나는그런 기분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에다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하는 말들은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올 곳은 없었지만,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 야구 중계를 켜놓고그걸 보는 척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나눠진 공간을 또 둘로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계속하다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달 말인가. 내 룸메이트가 인스턴트커피 병에 넣은 반딧불이를 주었다. 병 속에는 반딧불이 한 마리와 풀잎과 물이 조금들어 있었다. 뚜껑에는 작은 공기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주위가 아직 밝아서 그것은 그저 물가의 검은 벌레로밖에 보이지않았다.
병 속에서, 반딧불이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약했고, 그 색은 너무도 엷었다. 내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좀더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의 어둠 속에 뿌렸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조금 앞에 있었다.
헛간을 태우다 그녀와는 아는 사람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친해졌다. 삼 년전의 일이다. 그녀와 나는 열두 살 가깝게 나이 차가 났다. 그녀는 스물이고 나는 서른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얘기를 하면서 거의 무의식걱으로 그 귤껍질 까기‘를 계속했다. 점점 내 주변에서 현실감이 흡수되어리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묘한 기분이다.
옛날에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재판을받을 때, 밀실에 가두어 조금씩 공기를 빼는 형벌이 어울린다고했다고 한다. 결국 어떤 처형 방법을 택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나는 문득 그 생각이 났다.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의 대부분은 백 퍼센트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멀리 흐르는 구름을 바라볼 때처럼 아주 아련해지고 기분이좋았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내가 물었다. 잠깐 멍하니 있었던 탓에 잘못 들은것 같았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반복했다.
"헛간 이야기를 듣고 싶군." 내가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다운 것이 없었다.
간단한 이야깁니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이 붙은 성냥을 던지는 겁니다. 가만 놔두고, 그게 끝이죠. 다 타는 데 십오 분도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말했다. "남의 헛간을 태운단 말인가?" "그렇죠." 그는 말했다. "당연히 그렇죠. 그러니까 말하자면범죄행위죠. 당신과 제가 지금 이렇게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처럼,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어째서 내게는 말하는 거지?" 그는 왼손 손가락을 곧게 펴더니 자기 볼을 문질렀다. 조금 자란 수염이 메마른 소리를 냈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인간의 행동양식 같은 걸 잘 알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저는 소설가란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물을있는 그대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얘기한겁니다."
정말이지 완전히 버려진 헛간이다. 선로를 향해 펩시콜라의 양철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그런 것을 건물이라고 불러야 할지자신이 없지만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그가말한 대로, 누군가 태워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리고 있다. 우리집 근처의 헛간은 여전히 한 곳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헛간이 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또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춤추는 난쟁이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나더러 춤을 추지 않겠냐고 했다. 그것이 꿈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꿈속에서도 나는 몹시 지쳐있어서 "미안하지만 피곤해서 못 추겠는데" 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난쟁이는 그 일로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난쟁이는 혼자서 춤을 추었다.
나는 정성껏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 빵을 굽고 커피를 끓였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화장실 모래를 바꿔주고 넥타이를매고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갔다. 코끼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 혁명이 일어난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춤추는 난쟁이만은 아직 사람들 앞에서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얘기야. 그러니까 남들한테는 말하지마. 내 이름도 말하지 마. 알았지?"
15번 작업대에서 발톱을 붙이고 있는 여자애는 아주 날씬하고 중세시대 회화에 나오는 소녀 같았다. "실례합니다."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제복을보고, 발 언저리를 보더니, 다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모자를벗고 먼지막이용 안경을 벗었다. 확실히 대단한 미인이었다.
"내가 네 몸속에 들어가. 그리고 무도장에 가서 여자를 유혹하고 춤을 춰서 꼬드겨. 그래서 그녀를 네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동안 너는 한 마디도 입을 떼서는 안 돼. 소리를 내서도 안 돼. 여자를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만약 소리를 낸다면?" 내가 물었다. "그때는 내가 네 몸을 가질 거야. 난쟁이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고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지옥에서 끄집어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나는 결국 소리치지 않았다. 거의 직관적으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것은 난쟁이가 벌이는 단순한 속임수다. 난쟁이는 내게 소리를 지르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한 번이라도 소리를 내면 내 몸은 영원히 난쟁이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게 바로 난쟁이가 원하는 바다.
"너의 승리야." 난쟁이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네 거야. 나는 나간다." 그리고 난쟁이는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건 아냐." 난쟁이는 말을 이었다. "넌 몇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야. 네가 한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
그 대신 영원히 숲속에서 춤을 추게 되겠지?" 나는 묻는다. "당연하지." 난쟁이는 말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네가직접 결정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난쟁이는 킬킬 웃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등을 쭉 펴고 눈을 감자, 바람 냄새가 났다. 과실처럼 풍요로움을 품은 바람이었다. 거기에는 까칠한 껍질이 있고, 과육의 끈적거림이 있고, 씨앗의 도톨거림이 있었다. 과육이 공중에서 터지자 씨앗은 부드러운 산탄이 되어 내 맨팔에 박혔다. 그리고 그뒤에는 미미한 통증이 남았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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