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Miracle 2
김재한 외 지음, 김봉석 해설 / 시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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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표현되는 상상의 세계

 

순수문학에 대별되는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는 나에게 있어서 가깝고도 먼 형식이었다. 그것이 가깝게 느껴졌던 이유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환상문학의 한 갈래인 판타지라는 장르가 친숙해졌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장르가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환상문학에 있어서 우리작가의 작품을 만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환상문학 단편선>과의 만남은 큰 기대감과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이 단편집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환상문학들이 방대한 장편임을 생각하면 단편의 환상문학은 솔직히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묘사와 설정, 색다르게 창조된 인물들의 성격부여와 행동묘사 등 환상문학은 본격적인 이야기 앞서 인물과 배경에 대한 치밀한 사전 묘사가 요구되는데 짧은 단편으로 그 부분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일단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과연 아홉 편의 단편들이 어떤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킬 지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

 

여러 작가의 모음집인 만큼 첫 작품이 주는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 마치 야구에서 선두타자의 역할이 크듯 여러 작가가 포진한 모음집에서 호기심 가득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는 첫 작품이야말로 몰입된 독자들이 끝까지 책에서 손을 떼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상아처녀]는 만족스럽다.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인간의 이기가 부른 허영과 생명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랑마저도 주입되고 강요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부도덕해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뱀파이어라 불리는 흡혈귀의 삶을 그린 [카나리아]와 [사육]은 뱀파이어를 통해 인간의 처절한 삶을 마음껏 은유한다. [카나리아]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재영의 절규는 이미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한 현실에서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만 보인다. [사육]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대치구도를 넘어 인간이 뱀파이어가 가진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포획한다는 내용이 신선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안정적인 공급방법인 사육은 그렇게 그들에게까지 이용되는 것이다.

 

숨 막히는 모험과 함께 희생을 통해 더 큰 이상을 창조한다는 내용이 담긴 [용의 비늘]은 가장 큰 평점을 줄만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의 불우한 태생과 신비스런 모험,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이야기 등 환상문학의 정석이 되는 요소를 가지면서도 아주 흥미진진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다음에 등장하는 [윈드 드림머] 역시 [용의 비늘]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베일에 싸인 인물과 감춰진 진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기적적으로 주인공들을 구하는 신비의 물체 등 이 두 단편은 장편으로 발전해도 좋을 요소와 이야기를 두루 갖췄다는 생각이 든다.

 

[목소리]는 익숙한 전래동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정말 재밌는 단편이다. 인간에게 큰 해가되는 요괴라도 그 해를 끼치게 만드는 원인은 인간에게 있었으니 '요괴는 오로지 악하고 인간은 오로지 선하다.' 라는 생각은 그릇된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걸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관대함과 아량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꼭 필요한 자질이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버린 단 하나의 행복]은 반전과 아이러니가 주는 쾌감이 큰 단편이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해야 하는 운명. 이 기막힌 운명의 사슬은 한 남자를 절망의 끝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고, 다른 한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절망에서 자신의 운명을 끝내 죽음의 안식으로 안내했다.  

 

[세계는 도둑맞았다]는 과학기술 위에 군림하는 마법기술이 판치는 사회를 그린 SF단편이다. 마법에 의해 진보된 기술은 외계인과의 한판 대결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외계인과의 이 엄청난 혈전에는 인간의 영혼에 기생하는 악마가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운다는 설정이 참신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외계인은 인간을 숙주로 삼기 위해 싸우고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외계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인간-악마 연합군과 외계인과의 싸움 이후가 궁금해진다. [과거로부터의 편지]는 인간을 유혹하는 악귀가 등장하는 단편으로 악귀와 퇴마사의 싸움이 볼만한 작품이다. 친숙한 소재여서 그런지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편하게 읽었다.

 

<한국환상문학 단편선>은 아홉 작가 저마다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재밌고 참신한 이야기였다. 몇 편은 호흡을 좀 더 길게 잡아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을 작품도 있었고 몇 편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다른 매체로의 '재가공'을 해도 좋을 작품도 있었다. 애초에 부실한 설정 운운했던 내 염려는 정말 기우였단 생각이 든다. 비록 단편이지만 한 편의 훌륭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박수를 보내고 이 작품들이 더 멋진 작품을 위한 초석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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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1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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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는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특이하게도 남자였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여성으로 변해 한동안 여성으로 살다가(심지어 아이까지 낳고!) 다시 그 계기로 남성으로 변한 사람이었다. 제우스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경험한 그에서 어느 때가 더 행복했냐고 묻자 그는 여성일 때가 아홉 배는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과연 정말 그럴까? <고독의 우물>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테이레시아스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여성으로써의 삶'에서는 도무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남성으로 위장한 채 남자로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평생동안 '남장을 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단 채 뭇사람들의 경멸어린 시선 속에서 지독한 고독을 맛보면 살게 된다.

 

모턴 힐의 고던 가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스티븐. 분명 여아였지만 남자아이이기를 고대하던 부모의 바람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평생을 남자와 같은 삶을 살 거라는 운명도 함께 아로새겨졌다. 아이는 그렇게 '남자로 되어라' 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한껏 받으면서 남다르게 자랐다. 아이의 아버지인 필립 경은 자신의 아이가 특별하다는 것을 일찍이 눈치 챘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덮어두었고 그것으로 인해 아이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반면에 스티븐의 어머니인 애너는 자신의 아이가 지닌 특별한 모습에 많이 당황했으며 모정을 베푸는 데 주저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애뜻한 관계는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스티븐이 남성의 모습으로, 남성을 추구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필립 경은 끝까지 지켜줘야 할 자신의 소중한 딸을 남기고 세상을 뜨고 만다. 필립 경의 죽음은 스티븐과 애너의 관계를 더욱 소원하게 만들었고,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강이 생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에게 폭풍과 같은 사랑이 찾아오게 된다. 안젤라 크로스비라는 여인은 단박에 스티븐을 사로잡았고 그를 애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부녀였으며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그녀를 향한 스티븐의 사랑이 절정에 이를 무렵 그녀는 스티븐을 떼어놓기 위해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치고 이 모든 전황을 마침내 애너가 알게 된다. 자신의 딸이 벌인 이 기묘한 애정행각이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 전에 애너는 스티븐에게 집을 떠나줄 것을 당부하고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인다.

 

집을 떠난 스티븐은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작품쓰기에 몰두한다. 패배감을 안겨준 사랑, 자신을 거부하는 어머니,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자 창작에 열을 올린다. 다행히도 그렇게 만들어진 첫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고 명성과 함께 새로운 친구들도 얻게 된다. 그리고 한 친구의 제안에 따라 파리라는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스티븐이 파리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쯤에 때 갑자기 전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남자들이 전쟁터로 향했다. 스티븐 역시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의 지시로 부대에 지원을 하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응급차 운전수로 활약한다. 그리고 모든 운명적인 만남이 그렇듯 생사를 넘나드는 이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총소리와 병자들의 울부짖음을 잊게 만드는 소중한 인연이 찾아온다.

메리라는 이름의 그 여자아이는 부대에서 만난 스티븐을 전적으로 따르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맡은 임무를 다한다. 전쟁이 끝나고 갈 곳 없던 메리는 스티븐에게 각별한 정을 느껴 그녀를 따라오게 된다. 곧 메리는 스티븐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스티븐은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이 어린 아가씨 때문에 큰 번민에 빠졌으며 초조함에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스티븐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어린 연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둘은 사랑에 충만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하나씩 천천히 찾아왔다. 스티븐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히 해결해 나갔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사랑으로 만든 성 안에 메리를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고, 특별한 사교모임에서 사귄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둘의 관계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메리를 향한 사랑이 커질수록 같이 커지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 힘겨워하다 끝내 스티븐은 발레리의 표현대로 '순교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성성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 스티븐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모든 사랑을 포기한 채 지독한 고독의 심연을 맛봐야 하는 그녀에게 삶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당대의 편견과 홀로 맞서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항상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봐야했던,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던, 육식동물에 쫓기는 초식동물의 삶 그 자체였다. 게다가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나락 속으로 몬 어머니와의 반목은 그녀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깊이를 잘 말해준다. 스티븐의 절규와 같은 기도로 마무리되는 <고독의 우물>은 평범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남나?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한가지, 모든 고독의 우물에는 사랑이란 감정이 밑바닥에 침전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 사랑을 수면 위로 떠올리기 위해 부단히 아낌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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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가지 결정 -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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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움직인 역사적 선택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건의 구입에서 시간의 활용, 일의 선결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결단을 요하는 수많은 상황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했던 선택과 결정은 다시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시말해 그 결정으로 일의 결과가 좋아진 경우는 좋은 감정이 생겨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게 되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한 경우는 밀려오는 후회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즉 모든 선택과 결정은 항상 그것으로 인한 결과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결과에 의해 선택과 결정의 가치가 비로소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선 결정의 순간에 신중해야 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주어진 대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런 우리의 삶처럼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직면한 상황에서의 결정과 선택, 그것이 결과적으로 개인과 나아가 한 국가의 운명을 갈라놓은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108가지 결정>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역사적 결정의 순간’들을 다루고 있다. 위만의 쿠데타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인 부계성 강제조항 폐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가히 운명을 뒤바꾸었다라고 표현할 만한 사건 108가지를 시대의 순서로 구성했다. 이는 우리시대 역사학자 105명이 함께한 거대 프로젝트이며 한국사의 흐름과 우리역사의 임계점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시도라 생각된다.

내가 책에서 주목한 내용 중에 하나는 ’역사적 선택’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위화도 회군’에 관한 내용이다. 장차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인 위화도 회군은 단순히 전쟁의 불가함을 표시한 반란이라기보다도 당시 두 핵심 세력이었던 최영과 이성계의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대리전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좀 더 상상력을 더해서 이성계의 위화도까지의 진군과 거기에서의 ’머뭇거림’은 명분을 위한 쇼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참 이색적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만주를 향한 첫 진출이 좌절됐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늘 방어하기만 급급했던 우리의 역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나 역시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회군은 당연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당시의 정황상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안팎으로 심각한 불안정에 휩싸였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내적인 정치 불안과 소요에 더해 대외적인 전쟁은 민족의 존속을 위협하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당연한 것이다.

위회도 회군 외에도 다양하고 중요한 역사적 결정들이 그 상황과 함께 짤막하게 그려진 <108가지 결정>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과 시간이 아닌 중요한 결정을 이어서도 우리역사의 굴곡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역사서라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역사적 결정이 현대로 오면서 약간 의구심이 드는 게 많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사는 시대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보니 그 중요성과 파급성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는 또 어떤 역사적 결정이 이루어질지 그래서 그 결정으로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때면 이 책의 제목도 바뀌어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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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들] 서평단 알림
전사들 -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 '이기는 기술'
프랭크 맥린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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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칭기즈칸, 카이사르, 알렉산드르가 갖는 공통점이라면 인류의 역사에 선명한 자취를 남긴 위대한 영웅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강렬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전략으로 수많은 민족을 굴복시켰으며 방대한 영토를 손안에 넣었다. 한편 이들 못지않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전사들'이 있었다. 바로 카리스마 넘치는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비열한 음모꾼 코르테스 그리고 장기전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력한 독재자 아틸라 그리고 탁월한 싸움꾼 리처드와 관계 지향적 전쟁영웅 나폴레옹이 그들이다. 그들은 누구나 지지하는 영웅은 아니었어도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부각시킬 만한 능력을 가진 전사들이었다.

 프랭크 맥린의 <전사들>에서 소개되는 이 여섯 인물들을 처음 봤을 때 난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이유로 이 '여섯 분'을 한 자리에 모셨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초대받지 못할 인물임이 확실해 보이는 사악한 정복자 코르테스가 다른 전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함을 넘어 솔직히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왜 이 여섯 명을 전사란 이름으로 묶어 관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거머리 같은 궁금증이 되었다. 생각건데 적어도 이 인물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목적달성의 분명함이나 냉철한 판단력, 불굴의 추진력 등이 그들을 '전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의로운 카리스마를 가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용맹함으로 똘똘 뭉친 반란자요 억압받는 자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노예라는 신분에 묶여 고통 받고 있는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봉기했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신의 세력을 훌륭히 조정하여 훈련된 로마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스파르타쿠스는 물질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작은 성과에 도취되어 안하무인이 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리와 강직함이 빛나던 스파르타쿠스도 의리를 저버린 동맹국의 배신과 끊임없이 괴롭히는 로마군 앞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최악의 병사들을 조련하며 싸움에 임했고, 불굴의 투지를 보여줬던 그에게 '훌륭한 전사'라는 영광은 아주 당연한 수식어로 보인다.

 스파르타쿠스와는 전혀 다른 인간성을 지닌 악랄한 약탈꾼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 악마같은 열정에서 비롯된 온갖 술수와 감언이설을 정복의 도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자신을 위대한 승리자로 합리화하는 포장지로 썼다. 그는 황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도둑놈이었으며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집요함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한편으로 그는 목적달성을 위해 필요한 세력을 이용하는 영민함을 가졌고, 낯선 땅에서 우왕좌왕 하는 부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지녔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지극히 개인적인 탐욕과 허영을 채워 줄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워줄 만큼의 행운이 늘 그와 함께 했다. 그렇게 그는 한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엄청난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스텍 원정은 '승리자'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았고 그 역시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자질로 승리를 이끈 전사가 될 수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거대 세력이 위용을 떨치는 와중에 자신을 낮추고 숨죽였으며 절대로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안동김씨의 전횡에 오랫동안 숨죽였던 흥선대원군을 그에 비견할 수 있으리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절대 초반에 승부수를 띄우지 않았다. 모든 걸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항상 장기전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동안 전국을 호령한 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만큼 그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그들의 장점을 수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고 세심한 관찰력으로 적을 두루 살피는 그의 전술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적의 틈새에 배신자를 심어두었고 이는 승리로 이어졌다. 인내심과 관찰력의 달인이자 현명한 지략가인 그 역시 전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유목민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세력을 이끌고도 로마와 같은 '발전된' 토착민족들을 거침없이 무찔렀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대를 단순히 말 타고 날뛰는 '야만족'에서 벗어나 공성기구를 이용할 줄 아는 '신부대'로 만들었다. 업그레이드된 야만족의 놀라운 전투력에 동로마 제국은 공포에 휩싸였고, 이른바 '아틸라 증후군'까지 생겨났다. 아틸라의 전과는 계속 이어져 수중에 떨어지는 도시의 수가 늘어났으며 돈도 두둑하니 얻어 내 자신의 세력에 필요한 당근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 돌풍의 주역인 아틸라였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의 정석은 적절한 동맹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쓰라린 실수로 아틸라는 자신의 동맹국을 적으로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매수당한 자신의 참모들이 일을 꾸밈으로써 결국 파국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서구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이름은 그의 전사로서의 자질을 잘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장점은 물론 상대가 가진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

 사자왕이라 일컬어지는 리처드는 지칠 줄 모르는 전쟁기계였다. 그는 몸소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그 어떤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지휘의 대명사 손견의 유럽버전인 것처럼 그의 손에는 항상 칼이 있었고 최전선에서 자신의 군대를 다스렸다. 이 겁 없이 휘젓고 다니는 전쟁기계에게도 라이벌이 있었으니 사라센을 이끄는 살라딘이란 자였다. 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맞수였으며 이런 저런 싸움 끝에 승패를 나눠가졌다. 둘의 싸움은 지지부진했고, 한쪽이 완벽하게 다른 한쪽을 제압하진 못했다. 한편 리처드는 자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길었던 원정을 대충 갈무리한 채 귀향해야 했다. 그리고 고국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역시나 솔선해서 싸움에 임하다 끝내는 전사하고 만다. 그의 운명은 정말이지 손견과 닮아 있다. 최고의 지휘자는 항상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을지언정 전사가 되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충분한 자질이었다.

 두 말할 필요 없는 남자 나폴레옹. 그는 강한 군인이었고 여러 전투를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을 뒤로 하고 <전사들>에서 초점을 맞춘 건 다름 아닌 그의 '인간관리력'이었다. 인내심 없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들을 항상 곁에 두었다. 그리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이용했다. 인재탐이 많았던 조조가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반면 나폴레옹은 인재들을 끄는 자기장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었다. 좋은 인재는 자신의 능력을 펼치게 해줄 좋은 상관을 만나야 하는 게 필수인 것처럼 초창기의 나폴레옹은 그 임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시간을 거듭할수록 나폴레옹은 수긍할 수 없는 독단으로 부대를 지휘했고, 요상한 이국 문화에 심취했으며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 철두철미한 전략가가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이며 망가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약해져가는 그 이성의 불꽃은 그를 깎아 내리기엔 부족해 보인다. 무수한 전장 속에서 승리를 위해 몸부림 쳤던 그는 그 어떤 인물보다도 전사가 되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비록 말년은 암울했지만 말이다.

 <전사들>에서 다루는 여섯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무기로 무장해서 승리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자들이다. 그런데 승리자인 그들을 '전사들'이란 이름으로 묶는 것 외에는 어떤 공통적인 자질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생도 성장과정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점이란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가장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밖에... 그들에게 우열을 가리는 일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상황과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강인한 전사로 꼽을 수도 있고, 누구는 리처드에 손을 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승리자의 당연한 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편안한 죽음'과 관련해 생각해 볼 때 그들 대다수는 '참된 승리자'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명'에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역사의 귀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당당히 남아 후세에 전해질 것이며 불행히도 그들을 아는 사람의 대다수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들을 진정한 승리자로 불러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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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샌드위치 - 서른살 경제학 유병률 기자가 뉴욕에서 보내온 컬처비즈에세이
유병률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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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으로 자국 내에 수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 창출은 물론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를 몰고 왔다는 기사나 천만 관객을 돌파한 우리나라의 한 영화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는 뉴스를 볼 때면 잘 만들어진 영화, 더 나아가 잘 만들어진 문화 하나가 그 나라의 경제를 살찌울 수도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한편 이러한 성공으로 야기된 문화가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신념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지자체에 영화나 드라마 유치 경쟁을 불러왔고, 한류열풍에 기대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을 부추겨 투자를 이끌어냈으며 '문화에 투자하세요.'라는 공익광고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바야흐로 문화 중흥시대.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문화가 힘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유병률 저의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문화가 충분히 부를 창출할 수 있으며 지금은 물론 미래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 즉 문화가 충분히 돈이 되는 일이며 이는 갈수록 명백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뉴욕을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뉴욕에 의해 탄생된 작가가 다시 뉴욕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람들을 위한 문화가 다시 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해 더욱 더 풍성해진다는 그 이야기는 문화가 촉발하는 놀라운 효과를 잘 보여준다.

 

나 역시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태리의 한 택시기사가 턱시도를 입은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정말 묘한 일이기에 차림이 왜 그러냐고 취재진이 질문을 하자 그가 하는 말이 일을 끝마치고 바로 오페라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택시기사와 오페라라니 만약 그 상황을 우리나라로 옮겨왔다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은 이태리였고, 이색적인 풍경이기는 하나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 끄덕임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이태리는 문화적 저면이 튼실한 나라라는 인정과 공감이다.

 

택시기사마저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중 과연 어느 곳의 국민이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는 곳에서 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둘 중 어느 곳이 문화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곳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문화적 토대가 빈약한 곳에서 경제적 파급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영화 일변도로만 뻗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 저변은 더더욱 그렇다. 어서 빨리 우리의 택시기사 아저씨들도 당당히 아이다 같은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 오기를...

 

<딜리셔스 샌드위치>에서 강조되는 '문화의 저력'은 문화 저변 확대에 대한 외침과 문화적 마인드 함양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후 '20대여, 자기만의 연구실을 갖자'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마무리된다.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내용을 담은 이 짤막한 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부단히 연구하는 건 경쟁력의 원천이 되며 험난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커다란 힘이 될 거라고 강조한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알기만 한다면 정말 좋으련만 그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으니 한 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내가 진실로 좋아하는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을 당장 포기하지는 말자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후련하게 목청껏 외친 저자는 마지막 장을 통째로 글쓰기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낸다. 미국 유명 대학의 글쓰기 강좌를 언급하며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합리적인 사고의 정리를 위해서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소통'을 여는 중요한 도구이며 리더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그 사람의 자질과 리더십이 드러나는 만큼 글쓰기를 소홀히 해서는 돋보이는 사람 나아가 한 집단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토록 중요한 글쓰기.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될까? 저자가 언급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순명료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며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방법은 간단하되 제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불필요한 부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쌓이는 경험은 진리의 한마디보다 더 빛나는 법이다. 좋은 글쓰기는 많은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문화가 경제의 핵심 코드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딜리셔스 샌드위치>는 곳곳의 생생한 정보를 토대로 이야기가 꾸며져 내가 확연히 느끼지 못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게 해주었다. 점심을 간단히 때우며 최고의 문화를 즐기는 그들을 보면서 단순히 삶의 질을 결정짓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사회 자체를 풍성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글쓰기에 꾸준히 시간을 할애했던 내 생활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법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 안도감과 함께 묘한 성취감도 들었다. '문화를 이해하고 글쓰기에 투자하라'는 이 짧은 문구는 이제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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