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Miracle 2
김재한 외 지음, 김봉석 해설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언어로 표현되는 상상의 세계

 

순수문학에 대별되는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는 나에게 있어서 가깝고도 먼 형식이었다. 그것이 가깝게 느껴졌던 이유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환상문학의 한 갈래인 판타지라는 장르가 친숙해졌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 장르가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환상문학에 있어서 우리작가의 작품을 만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환상문학 단편선>과의 만남은 큰 기대감과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이 단편집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환상문학들이 방대한 장편임을 생각하면 단편의 환상문학은 솔직히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묘사와 설정, 색다르게 창조된 인물들의 성격부여와 행동묘사 등 환상문학은 본격적인 이야기 앞서 인물과 배경에 대한 치밀한 사전 묘사가 요구되는데 짧은 단편으로 그 부분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일단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과연 아홉 편의 단편들이 어떤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료시킬 지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

 

여러 작가의 모음집인 만큼 첫 작품이 주는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 마치 야구에서 선두타자의 역할이 크듯 여러 작가가 포진한 모음집에서 호기심 가득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는 첫 작품이야말로 몰입된 독자들이 끝까지 책에서 손을 떼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상아처녀]는 만족스럽다.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인간의 이기가 부른 허영과 생명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랑마저도 주입되고 강요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부도덕해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뱀파이어라 불리는 흡혈귀의 삶을 그린 [카나리아]와 [사육]은 뱀파이어를 통해 인간의 처절한 삶을 마음껏 은유한다. [카나리아]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재영의 절규는 이미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한 현실에서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만 보인다. [사육]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대치구도를 넘어 인간이 뱀파이어가 가진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포획한다는 내용이 신선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안정적인 공급방법인 사육은 그렇게 그들에게까지 이용되는 것이다.

 

숨 막히는 모험과 함께 희생을 통해 더 큰 이상을 창조한다는 내용이 담긴 [용의 비늘]은 가장 큰 평점을 줄만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의 불우한 태생과 신비스런 모험,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이야기 등 환상문학의 정석이 되는 요소를 가지면서도 아주 흥미진진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다음에 등장하는 [윈드 드림머] 역시 [용의 비늘]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베일에 싸인 인물과 감춰진 진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기적적으로 주인공들을 구하는 신비의 물체 등 이 두 단편은 장편으로 발전해도 좋을 요소와 이야기를 두루 갖췄다는 생각이 든다.

 

[목소리]는 익숙한 전래동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정말 재밌는 단편이다. 인간에게 큰 해가되는 요괴라도 그 해를 끼치게 만드는 원인은 인간에게 있었으니 '요괴는 오로지 악하고 인간은 오로지 선하다.' 라는 생각은 그릇된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걸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관대함과 아량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꼭 필요한 자질이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버린 단 하나의 행복]은 반전과 아이러니가 주는 쾌감이 큰 단편이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해야 하는 운명. 이 기막힌 운명의 사슬은 한 남자를 절망의 끝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고, 다른 한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절망에서 자신의 운명을 끝내 죽음의 안식으로 안내했다.  

 

[세계는 도둑맞았다]는 과학기술 위에 군림하는 마법기술이 판치는 사회를 그린 SF단편이다. 마법에 의해 진보된 기술은 외계인과의 한판 대결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외계인과의 이 엄청난 혈전에는 인간의 영혼에 기생하는 악마가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운다는 설정이 참신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외계인은 인간을 숙주로 삼기 위해 싸우고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외계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인간-악마 연합군과 외계인과의 싸움 이후가 궁금해진다. [과거로부터의 편지]는 인간을 유혹하는 악귀가 등장하는 단편으로 악귀와 퇴마사의 싸움이 볼만한 작품이다. 친숙한 소재여서 그런지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편하게 읽었다.

 

<한국환상문학 단편선>은 아홉 작가 저마다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재밌고 참신한 이야기였다. 몇 편은 호흡을 좀 더 길게 잡아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을 작품도 있었고 몇 편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다른 매체로의 '재가공'을 해도 좋을 작품도 있었다. 애초에 부실한 설정 운운했던 내 염려는 정말 기우였단 생각이 든다. 비록 단편이지만 한 편의 훌륭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데에 박수를 보내고 이 작품들이 더 멋진 작품을 위한 초석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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