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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1 ㅣ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그리스 신화에는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특이하게도 남자였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여성으로 변해 한동안 여성으로 살다가(심지어 아이까지 낳고!) 다시 그 계기로 남성으로 변한 사람이었다. 제우스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경험한 그에서 어느 때가 더 행복했냐고 묻자 그는 여성일 때가 아홉 배는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과연 정말 그럴까? <고독의 우물>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테이레시아스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여성으로써의 삶'에서는 도무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남성으로 위장한 채 남자로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평생동안 '남장을 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단 채 뭇사람들의 경멸어린 시선 속에서 지독한 고독을 맛보면 살게 된다.
모턴 힐의 고던 가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스티븐. 분명 여아였지만 남자아이이기를 고대하던 부모의 바람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그 이름처럼 평생을 남자와 같은 삶을 살 거라는 운명도 함께 아로새겨졌다. 아이는 그렇게 '남자로 되어라' 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한껏 받으면서 남다르게 자랐다. 아이의 아버지인 필립 경은 자신의 아이가 특별하다는 것을 일찍이 눈치 챘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덮어두었고 그것으로 인해 아이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반면에 스티븐의 어머니인 애너는 자신의 아이가 지닌 특별한 모습에 많이 당황했으며 모정을 베푸는 데 주저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애뜻한 관계는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스티븐이 남성의 모습으로, 남성을 추구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필립 경은 끝까지 지켜줘야 할 자신의 소중한 딸을 남기고 세상을 뜨고 만다. 필립 경의 죽음은 스티븐과 애너의 관계를 더욱 소원하게 만들었고,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강이 생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에게 폭풍과 같은 사랑이 찾아오게 된다. 안젤라 크로스비라는 여인은 단박에 스티븐을 사로잡았고 그를 애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부녀였으며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그녀를 향한 스티븐의 사랑이 절정에 이를 무렵 그녀는 스티븐을 떼어놓기 위해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치고 이 모든 전황을 마침내 애너가 알게 된다. 자신의 딸이 벌인 이 기묘한 애정행각이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 전에 애너는 스티븐에게 집을 떠나줄 것을 당부하고 스티븐은 이를 받아들인다.
집을 떠난 스티븐은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작품쓰기에 몰두한다. 패배감을 안겨준 사랑, 자신을 거부하는 어머니,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자 창작에 열을 올린다. 다행히도 그렇게 만들어진 첫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고 명성과 함께 새로운 친구들도 얻게 된다. 그리고 한 친구의 제안에 따라 파리라는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스티븐이 파리에 어느 정도 적응할 때쯤에 때 갑자기 전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남자들이 전쟁터로 향했다. 스티븐 역시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의 지시로 부대에 지원을 하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응급차 운전수로 활약한다. 그리고 모든 운명적인 만남이 그렇듯 생사를 넘나드는 이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총소리와 병자들의 울부짖음을 잊게 만드는 소중한 인연이 찾아온다.
메리라는 이름의 그 여자아이는 부대에서 만난 스티븐을 전적으로 따르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맡은 임무를 다한다. 전쟁이 끝나고 갈 곳 없던 메리는 스티븐에게 각별한 정을 느껴 그녀를 따라오게 된다. 곧 메리는 스티븐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스티븐은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이 어린 아가씨 때문에 큰 번민에 빠졌으며 초조함에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스티븐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어린 연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둘은 사랑에 충만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하나씩 천천히 찾아왔다. 스티븐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히 해결해 나갔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사랑으로 만든 성 안에 메리를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고, 특별한 사교모임에서 사귄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둘의 관계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메리를 향한 사랑이 커질수록 같이 커지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 힘겨워하다 끝내 스티븐은 발레리의 표현대로 '순교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성성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 스티븐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모든 사랑을 포기한 채 지독한 고독의 심연을 맛봐야 하는 그녀에게 삶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당대의 편견과 홀로 맞서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항상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봐야했던,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던, 육식동물에 쫓기는 초식동물의 삶 그 자체였다. 게다가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나락 속으로 몬 어머니와의 반목은 그녀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깊이를 잘 말해준다. 스티븐의 절규와 같은 기도로 마무리되는 <고독의 우물>은 평범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빼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남나?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한가지, 모든 고독의 우물에는 사랑이란 감정이 밑바닥에 침전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 사랑을 수면 위로 떠올리기 위해 부단히 아낌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