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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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진실은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반복된다. 설령 그것이 오류의 역사라 할지라도 인간은 같은 오류를 계속 반복해왔다. 이 끊임없는 오류의 쳇바퀴를 지켜 보면서 인류의 진보나 변증법적 낙관론 같은 것을 기대하기에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누군가 저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우리네 삶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비춰질 것이다. 타자에 대한 담론은 역사 이래 계속 되어왔고 여전히 유효하다.


토니 모리슨이 <빌러비드>를 출간한 지 30년이 지났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간으로부터 150년 이상이 지났다. 그러나 소설은 과거의 회환과 한탄으로 읽히지 않는다. 대신에 여전한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의 폭력에 무너져버린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 이런 주제를 대하는 작품 안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배여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감을 잃게 된다. 주제의 건강성과 무관하게 공감의 강요는 어딘가 편파적으로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러나 <빌러비드>는 처절하고 얄궂은 운명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려낸다. 과도한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독특한 기법과 함축적인 언어가 두드러진다. 작가는 사실적인 소재에 환상적인 기법을 가미했으며 실화에 기반한 서사이면서 시적으로 표현했다. 가령 구구절절한 흑인 박해의 역사를 '세상에 불운 따위는 없어. 흰둥이들이 있을 뿐이지' 같은 한 마디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식이다.


소설은 노예의 삶에서 탈출해 자유를 얻은 흑인 여인 세서의 삶을 추적한다. 노예로서의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노예로서 세서의 삶은 당시 다른 노예들의 참담한 삶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인간으로서 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분명한 자식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지만 그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그 시대 노예들의 일반적인 삶이었다. 게다가 세서는 집단 탈출 계획에서 유일하게 발각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당시의 노예로서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조차도 노예로서의 삶은 죽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알게된 이후에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세서는 그 운명의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인성과 모성을 모두 내던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마침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세서는 노예제도의 피해자이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로서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에 놓인다. 피해자로서의 최소한 동정조차 얻지 못한 채 고립되어 죽음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 과거의 망령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여자는 세서의 죄의식과 회한의 현신이다. 빌러비드를 통해 세서는 기나긴 속죄의 의식을 치르지만 '짙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것은 모든 것을 내던진 파멸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과거의 삶은 현재의 삶을 잠식하고 미래의 희망마저 빼앗아 버렸다. 작가는 이 기구한 운명을 놓고 사회 구조적 모순을 파고 들거나 개인 성격의 결함을 탓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실화에 기반한 비극적 운명이 특수한 인물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도처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소설은 흑인이자 여성 노예로서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담론은 확장될 수 있다. 세서와 빌러비드의 기묘한 관계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외적 갈등이 아니라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유령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회한의 망령이므로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유령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또한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과거의 망령은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과거의 유령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트라우마인 동시에 미국의 오랜 치부의 역사가 현현된 망령이기도 하다. 이민자의 나라'이자 인류 박해에 관한한 뼈아픈 오류를 경험한 미국이 지금 새로운 박해의 역사를 쓰려고 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가 아니지만 여전히 소수자로 머물러 있는 타자에 대한 담론이 왜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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