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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기억이 온갖 예술, 특히 서사의 매력적인 소재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반투명성에 기인한다.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실제 사실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억은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망각되거나 왜곡되어 저장되기 때문이다. 기억의 빈 부분을 채우고 어긋난 자리를 바로잡는 것은 서사 문학 속 인물의 주된 과업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한 공간이 빈 채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사 속에서 기억은 언제나 탐색과 나란히 놓인다. 인간은 기억을 실재보다 더 미화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그 기억을 탐색하는 일은 때로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기억을 파헤칠수록 왜곡된 기억은 그 처연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모르는 채로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When we were orphans)>는 어린 시절 놓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쟁으로 전 세계에 암운이 드리워진 1930년대를 배경으로 런던과 상하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런던에서 성공한 탐정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늘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 작가는 그 빈 공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인물의 과거로 독자를 이끈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퍼의 유년을 이루는 상하이를 기억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데 그것은 일인칭 화자의 인식 속에서 단편적이고 자의적으로 서술된다. 마침내 여러 상황들이 우연히 맞물려 기억에서만 존재하던 상하이로 크리스토퍼를 이끌지만, 이는 우연이기보다 필연이자 운명이다. 모든 해결의 실마리는 그것이 시작된 지점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