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한 겨울의 나가사키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일본 특유의 고즈넉한 거리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도시와는 다른 묘한 이질성이 깃든 도시 풍경에 매료되었다. 나가사키는 시간으로도 하나의 시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기 힘들었으며, 공간으로도 하나의 지역색을 품고 있지 않았다. 현재와 과거, 이 곳과 다른 곳이 이질적이지만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나가사키는 그런 역동적인 외관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도시 분위기는 정적이었다. 시간에 맞춰 종소리를 내며 노면레일을 따라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차만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에릭 파이의 <나가사키>, 이 짧은 소설이 품은 나가사키의 풍경도 내가 본 겨울의 나가사키와 다르지 않았다.  


이 소설의 구상은 2008년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의 사회면에 실렸던 기사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 놀라운 기사는 집주인 몰래 집에 숨어 들어 이불 벽장 속에 숨어 산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회면에 실린 기사의 근본이 대개 그러하듯 이 사건은 현대적 형태의 범죄를 제기한다. 게다가 사생활의 침범과 감시라는 가장 시대적인 공포를 시사하는 사건이다. 마땅히 공포나 스릴러의 내러티브를 가져야만 할 것 같은 모티프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건의 본질을 공포보다는 근원의 상실과 고독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로 되돌린다. 장담컨대 저 사회면 기사 한 꼭지보다 작가에게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흘러간 역사를 품은 채 잠들어 있는 조용한 나가사키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서술의 대부분은 남자의 의식을 맴돈다. '사는 일에 크게 실망하고 나가사키 변두리'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중년의 한 독신남의 의식 속에서 나가사키는 지루하고 환멸에 차 있다. 그러나 그 권태와 환멸에 동화된 듯 남자의 일상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 소설은 이 남자의 내면 풍경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나이 든 독신자로서의 삶, 나가사키의 풍경, 끊임 없이 울어대는 매미 같이 이따금 평정심을 헤집는 자연물의 변화까지 이야기는 오롯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논리적 인과 없이 서술된다. 그래서 서술은 점심 도시락에서 신문 기사로, 전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가사키의 풍경에서 신경질적으로 울어대는 매미소리로 예고 없이 도약한다. 인물의 의식 속에서 환상과 현실은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런 서술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 이 남자에게 끼친 내적 파동을 소설은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문제의 발생과 문제를 향한 인물의 치열한 대결이 지나가면 보통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간다. 그러나 남자의 실존에서 그 사건은 종료된 시점부터 시작된다. 현실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 남자의 내면에서는 잠자는 도시처럼 봉인된 감정들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가 집에 있을 때는 여자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던 그가 여자가 떠나간 집에서 오히려 여자의 흔적을 추적하며 번민한다. 물리적 공간의 침범이라는 단차원적인 사건이 남자의 인식에 뚜렷한 흔적을 새김으로써 이 사건은 단순히 사회적 문제의 차원을 넘어 실존적 문제를 제기한다. 남자와 여자는 한 공간에서 일 년을 넘게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침입자인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러한 사실을 자각조차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실상은 요구르트 몇 개와 감시용 카메라를 사느라 손해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사건 이후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여자의 모습을 '감시 카메라'를 통해 처음으로 대면한 그가 급작스러운 심경 변화를 일으켜 집에 전화를 거는 그 찰나적 순간, 여자의 얼굴을 비추는 '햇살'은 공허한 남자의 실존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연민과 용서를 넘어, 어쩌면 이해와 상호 위로로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사건은 남자의 텅빈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을지언정 끝내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도록 격려하지 못한다. 물리적 안식처를 잃어버린 여자와 정신적 안식처를 잃어버린 남자는 그들이 가진 동류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면하지 못한다. '위기'라는 외적 상황에 직면해 '우리'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고독에 잠식해가는 인류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다.


이런 남자의 모습은 나가사키라는 배경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 네덜란드가 나가사키의 정체성을 시나브로 바꾸었듯이 여자는 남자의 실존을 뒤흔들어 놓는다. 고독에 침잠하는 남자의 모습은 쇄국정책을 펼쳤던 나가사키의 모습을 또한 연상케한다. 골방에 침입한 여자는 데지마에 밀려든 네덜란드인의 완벽한 메타포다. 그래서 소설 속 나가사키의 풍경은 색깔을 잃은 잿빛으로 묘사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