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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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사람들이 앓는 시대적 질병은 그 시대를 둘러싼 징후들이 개인에 침투한 결과다. 따라서 그 시대의 준거를 통해 진단되어야 한다. 한 시대의 고유한 질병에서 모든 역사와 철학, 사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 낸 질병이 개인에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증상에 대한 정밀한 진단이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따르면 현대인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신경증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맹수나 쥐, 해충, 바이러스같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타자'라는 적에 의해 생겨나는 질병이 아닌 바, 단순한 예방접종으로 치료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저자는 현대인의 질병은 이런 면역학적 시대를 뛰어넘는 증후로서 이의 진단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냉전이 종식되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현대에 접어들어 갈등은 사라지는 대신 그 양상이 훨씬 복잡해졌다. 이제 우리 사회 속의 개인들은 제국주의를 향해 저항하지도 않고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신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투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유토피아의 실현을 요원하게 하는 각종 문제들이 산재해있다. 인재(人災)에 의한 사고, 정권에 대한 불만, 실업, 상대적 박탈감, 자살 등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개인은 그러나 자신의 환부조차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상대해야할 적, 다시 말해 적대적 타자가 종말을 고한 시대에 살고 있는 까닭이다.


책에 따르면 타자의 위협에서 벗어난 현대인이 맞서야 할 대상은 자아 그 자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폭력의 종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타자로부터 오는 폭력이 아니라 그 형태만 바뀐 또 다른 폭력이다. 저자는 이러한 폭력을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것이라고 설명한다.그가 말하는 시스템은 결국 사회 구조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전제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책은 현대는 부정성의 사회인 '규율사회'로부터 긍정성의 사회인 '성과사회'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인의 질병은 강제와 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과 그 사회에 내재된 시스템에 의해 발병하는 것이다. 외적인 규제가 아닌 성과의 극대화를 위한 자아가 현대인이 맞서야 할 적이자 질병의 원인인 것이다.


책은 현대인의 신경증적 질병을 사회학적으로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며 그 처방의 실마리를 내어 놓는다. 성과사회에서 성과에 대한 압박은 활동의 과잉을 낳게 되고 이는 근본적으로 개인에게서 '사색적 주의'의 기회를 앗아 간다. '사색' 다시 말해 '심심함'의 결여는 모든 문화적 업적을 방해하는 요인이기에 심각한 문제다. 이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적 병폐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활동의 과잉으로 인해 현대인은 유래 없이 풍부한 물적 자원을 누리고 있지만 예술과 종교, 문화 전반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은 상대적으로 빈곤해졌다.    


저자는 현대인의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한 성과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피로는 개별적이고 고립된 피로라고 진단한다. 이 개별적인 피로는 성과에 대한 압박에서 발생하는 히스테리에서 온다. <피로사회>는 피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트케를 인용하며, 이 고독한 피로에서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로 나아가기를 촉구한다. 이는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만들어내는 피로로서 개인에게 영감을 주고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거대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성과주의가 대신함으로써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가지고 왔으며, 영감을 주는 피로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이런 시대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피로사회>가 내놓은 이 시대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범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있지는 않다. 이 세계에는 '규율'이 '성과'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종교적 서사가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나라들도 많다. 이 책에 따르면 자칫 이러한 사회를 전근대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련의 지표들이 보여주는 자본주의적 성과가 극대화된 대부분 국가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징후들은 이 책이 말하는 그대로다. 우리는 사회의 복잡성을 그 사회의 발전상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의 복잡성이 행복지수와 비례하지 않음은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로사회>가 내놓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섬세한 비판은 적어도 현대인들이 자신의 환부를 똑똑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진단만으로도 영혼은 치유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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