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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1 ㅣ 세계문학의 숲 17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2년 3월
평점 :
백화점이 자본주의적 욕망의 집결체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현대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에서 묘사된 백화점을 둘러싼 풍경들은 오늘날 도시적 소비행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이고,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880년대이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통째로 21세기로 옮겨도 이질적이지 않을 만큼 시대적 변화를 적절히 포착하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전망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한 사회의 과거를 탐색하는 과정이기보다 현재를 반추하는 과정에 가깝다.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에밀 졸라는 삶의 비참함과 냉혹함에 시선을 두고 당대 사회를 치밀하게 그려내는 일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서의 천대받던 인상파 화가를 비롯해 <목로주점>의 변두리 하층 노동자, <제르미날>의 광부들, <나나>의 창부 등 다양한 직업군들의 현실적 삶에 대한 현미경 같은 묘사는 졸라의 역작 '루공-마카르 총서'에 제2 제정기의 프랑스 사회의 풍속화로서 큰 가치를 부여한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같은 맥락에서 졸라가 천착한 당대 사회의 세밀한 묘사에 문학적 의의를 두고 있다. 이 소설은 세계 최초 백화점으로 알려진 봉마르셰 백화점을 모델로 거대 자본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19세기 중후반의 파리의 모습을 그린다. 파리의 중심에 세워진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의 번영을 바탕으로 변화해가는 당시 상업 메카니즘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소비자들의 욕망과 무기력하게 몰락해가는 소상인들의 애환에 초점을 맞추며 변화하는 사회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졸라는 이 작품에서 일체의 가치판단을 보류한다. 백화점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부적절한 소비 행태를 부추겨 가정의 파탄을 이끌어내고, 몇 대째 한 자리에 붙박인 채 장사를 해오던 소상인들을 오랜 삶의 터전으로부터 몰아내는 장면을 여과없이 그려내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주느비에브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소상인들의 몰락은 백화점의 압도적인 번영과 대비되며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지만 여기에 동정이나 비난의 시선은 개입되지 않는다. 이는 절망과 체념이라기보다 시대를 정확하게 꿰뚫는 혜안에서 비롯된 변화에의 긍정이다. 이런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드니즈인데, 그는 몰락한 상인의 딸로서 소상인들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친 채 백화점 점원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드니즈는 몰락하는 상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백화점을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인물 유형이 긍정되는 것은 결국 작가가 자본주의의 성장이 가져다 줄 미래사회의 번영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음을 짐작케한다.
작가의 이러한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투자자와 경영자의 이해관계,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경영방침과 광고, 서비스로까지 확장되는 백화점의 역동적인 운영시스템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근로자들의 복지나 직장 내 파벌, 줄서기 따위의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관행도 소설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돈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자문하는 인물의 모습도 오늘날과 같다. 옥타브 무레와 드니즈 보뒤의 관계는 오늘날 수없이 변주되고 있는 신데렐라 신드롬의 판박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자본주의라는 인류의 거대한 욕망을 인간의 사랑과 관능이라는 개인적 차원으로 치환하여 보여주면서 욕망의 본질을 탐색한다. 소설의 압권은 9장에서 장장 50쪽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백화점의 하루 풍경이다. 소비의 욕구는 자기과시와 탐닉으로 확대되며, 소비의 공간은 밀회와 질투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거대자본의 상징으로서 욕망이 싹트는 공간으로서 백화점이라는 상징은 때로 인간의 부도덕함을 들추어내기도 하지만 졸라는 드니즈라는 드물게 긍정적인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부정적 측면을 상쇄시킨다. 그리하여 백화점도 욕망도 건재한 채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래서 우리는 한때 삶의 질을 변화시켰던 이 공간과는 모습과 기능에 있어 한치도 다르지 않은 오늘날 백화점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보게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