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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성석제의 새 소설이 나왔다는 것은 또 한번 소설의 정통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는 말이다. 소설의 정통성을 논하는 일은 개성과 다양성을 짓밟는 폭력이나 다름 없지만, 기법의 다양성을 무기로 서사의 부실함을 감추려는 몇몇 소설들을 만난 뒤라면 별 수 없이 깊은 맛을 내는 본격 소설을 갈망하게 된다. 성석제의 소설은 언제나 이야기의 본령을 준수하며 소설의 언어에 충실히 부합한다. 그의 소설이 이야기하는 '인간'은 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되며 그 개인은 현실적 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완벽한 허구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더 현실답게 보여주는 힘이 성석제 소설이 갖는 정통성의 근원일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를 막힘없이 기술하기란 어렵다. 한 인간의 삶이 요소요소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느닷없는 도약과 느닷없는 하강을 겪기도 하고 기대되는 것과는 다른 엉뚱한 결과를 맞이하기도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안타깝게도 권선징악의 법칙이 깨어진지도 오래다. 간단히 말해 개인의 인생은 복잡할 뿐 아니라 예측하기가 어렵다. 인생이 흘러갈 방향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단서는 그 인물의 성격이다. 그러나 성격만이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면 억울한 사람이 제법 많을 것이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은 개인의 성격이 환경에 의해 좌절을 겪게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한 사회의 흐름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시대적으로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를 아우르는 이 소설은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가족, 정확히는 한 개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단 하나의 인물 만수는 '인간이 안 될' 것 같다는 주변의 우려에 걸맞게 볼품없는 몰골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의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면에 주목한다. 만수는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만으로 뚝심있게 자기의 할 일을 한다. 평생을 신의와 희생만이 삶의 전부인 것 같이 살아 온 그의 주위에는 늘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이다. 태생적인 불리함을 남다른 성품으로 극복해내는 그의 모습은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성석제 소설 특유의 휴머니즘을 전해준다.
소설은 이처럼 시종 혼탁한 시대를 저 홀로 투명하게 살아가는 만수의 삶을 좇고 있지만 그의 됨됨이를 미화하거나 그 행적을 영웅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시류를 읽는 안목이 부족하며 부당함에 항의할 줄 아는 기백을 갖추지도 못한 만수의 소시민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혼란한 시대에 필요한 고결한 이상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편법의 유혹을 뿌리칠 만큼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저 위에서 고뇌하는 인물이기보다 밑바닥을 뒹구는 범인(凡人)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의 집념과 끈기에 걸맞는 거대한 성공을 마련해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만수의 삶은 시종 평균 언저리에 걸쳐져 있다.
<투명인간>은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한 평범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이 인물담에는 신화와 같은 신성함도, 민담과 같은 통쾌함도 없다. 그런 만수가 소설의 문제적 인물일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의 삶에 대한 성실한 태도와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부조리한 환경의 영향으로 거듭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 부적절한 삶의 하중을 견디기에 그의 육체와 정신은 가녀리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만수 뿐 아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 좌절을 겪으며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진다. 그들의 존재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부정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자기 앞에 놓인 삶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밝힐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투명인간>은 불투명한 오늘날을 비추는 우화이지만, 맹렬한 저항을 대신해 진정한 공감으로 소소한 위안을 주므로 비극적이지는 않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우리를 좌절케 하는 사회 보다는 좌절하는 개인의 모습에 주목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