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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R. K. 나라얀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10월
평점 :
동남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다보면 수많은 종교적 상징들과 마주하게 된다. 조지프 캠벨은 일찍이 신화는 거짓이 아닌 은유라고 말했지만, 숱한 신화의 유물들과 마주하다 보면 신화 자체가 비유이기보다 차라리 직설적으로 기술된 사실이 아닐까 착각마저 든다. 그만큼 동남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종교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제각기 독자적인 종교적 토대를 지니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서도 동일한 신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이다. 태국 에메랄드 사원을 둘러싼 회랑 내부에는 <라마야나>의 이야기가 세밀화로 그려져 있으며, 앙코르왓의 1층 회랑 부조에는 '랑카의 전투' 장면이 한쪽 벽면 가득 새겨져 있다. 좀 더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하누만의 모험을 각색한 께짝댄스가 일몰직후 상시 공연된다. 이처럼 범아시아적으로 퍼져있는 이 인도의 신화는 그 나라의 문화와 민족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는 했지만, 단순히 화소만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플롯까지 고스란히 전승된 모습이다. 이는 <라마야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를 보여준다.
인도의 소설가 나라얀이 다시 쓴 <라마야나>는 10,500연에 이르는 캄반의 서사시를 간결하게 다시 써낸 책이다. 다양한 이본 중 표준이라 여겨지는 발미키의 <라마야나>와 큰 줄거리는 같이하지만 라마의 도덕성과 권선징악의 교훈을 좀더 명징하게 그려내려 했다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비슈누가 라마로 환생하는 이야기와, 라마와 그의 동생 락슈마나가 현자 비스와미트를 따라 여행을 떠나며 겪는 모험이야기로 채워진다.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비스와미트의 입을 통해 인도 신화의 다양한 유래가 곁가지로 떠오른다. 유명한 강가(갠즈스강)의 유래나 인드라가 천개의 눈을 가지게 된 배경설화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본격적으로 라마의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그가 미틸라에서 시타를 만나면서부터다. 라마는 이후 권력에 대한 암투와 욕정에의 유혹 같은 속세적 시련을 겪지만 타고난 성품으로 이를 현명하게 이겨낸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악의 근본을 상징하며 비슈누를 환생하게 만든 본질적 이유인 라바나다. 시타를 빼앗긴 라마는 시타를 구하고 라바나를 물리치기 위한 모험을 강행하고 그 와중에 자타유와 하누만 등의 도움을 받는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이 쉴새 없는 이야기의 향연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와 소통되는 삶의 모습을 함의한다. 우리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과장과 기이함으로 낯설게 다가올 방콕 에메랄드 사원의 세밀화는 판타지가 아닌 (다시 캠벨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 세상의 은유들인 것이다. 특유의 기이함을 걷어낸 신화라는 보조관념은 현재의 삶이라는 원관념을 정확히 겨냥한다. 선과 악에 대한 관념의 일치는 물론이고, 탐욕, 질투, 나태, 우애, 의리와 충성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명료한 인과관계에 따라 보여준다.
<라마야나>는 종교적으로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숭배사상을 강화하는 이야기지만, 영웅의 일대기라는 범세계적인 화소를 담고 있어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이야기의 양면적이며 본질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신화의 측면을 비껴나더라도 <라마야나>는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인물들과 자연과 초자연을 넘나드는 선과 악의 대결, 명쾌한 선의 승리 등은 어떤 실증주의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창조적 서사의 완벽한 모범을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라마야나>가 아시아 전역에 걸처 다양한 예술 장르로 차용되고 변형될 수 있게 해온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