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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개성의 시대를 맞아 소설은 어떠해야 한다는 거창한 담론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한 작가가 개인의 차원에서 주로 천착하는 문제의식이 없을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독자의 호불호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그대로 다음 작품에 대한 독자의 기대치로 연결된다고 할 때 예상치 않은 작가의 변모는 자칫 모험일 수도 있다. 이기호의 세 번째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그의 소설 스타일에 대해 독자가 나름대로 구축해 놓은 정의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눈에 띄는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현대의 부적응적 인물의 전형인 이시봉도 없고, 주식용 흙과 매력적인 국기게양대 따위의 용도 전복의 소재도 특별히 등장하지 않는다. 또 표제작 '김 박사는 누구인가?' 정도에서만 과감한 형식의 파격을 이어받았을 뿐,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소설의 전통적 형식에 근접해졌다.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한풀 꺽인 자리에 작가는 사회와 치열하게 대결하는 개인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변모를 인식과 가치관의 변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기호의 소설은 대개 자칫 트리비얼리즘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자질구레한 것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약자에 대한 연민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풍자로 확장된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 기본발상-프라이드나 두루마리 휴지, 팬티 따위에 집착하는-이나 주제의식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다만 실험적 형식과 재기발랄한 유머에 기울어져 있던 무게중심을 반대편으로 좀 더 이동시킨 모양이다. 즉 작가는 스타일에 매몰되어 있던 서사를, 더 구체적으로는 리얼리즘적 서사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특징지어 온 형식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듯 보인다. 그래서 스타일은 한풀 꺾인 대신 소통의 통로는 좀 더 넓어졌고 진지해졌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대개 감추어진 진실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대상, 즉 실질적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소리나 의도를 결코 직접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래서 작품의 서술자나 초점화자는 하나의 단서를 통해 이들의 삶의 행방을 추적해 나간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서는 낡은 프라이드의 옛 주인인 삼촌이 남긴 '차계부'만이 삼촌의 행방을 추적할 유일한 단서로 남겨진다. '탄원의 문장'에서 진실은 법원의 판결문과 학생들의 탄원서 속에 다소 왜곡된 채 감추어져 있고, '화라지 송침'에서는 강박증을 앓게 된 남자의 과거가 오래된 지방 신문의 기사 한꼭지에 압축되어 있다. '이정-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2'에서는 아예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던 아들이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상태다. 이처럼 모든 단서들은 불완전하여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종종 한계에 부딪힌다. 이 소설집은 이처럼 현재의 문제상황을 제시한 뒤 불완전한 단서를 통해 과거를 역으로 추적하는 방식을 일관적으로 취하고 있는데, 책의 첫 작품으로 '행정동'을 배치해 기록이 가지는 본질적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은 의도적인 복선으로까지 보인다. '학적부'라는 서류를 통해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못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한 인간의 삶을 상상하는 행위는 기록이 가지는 명확한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기록되지 못한 것의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모든 이야기는 이처럼 '탐색'에서 시작되는 바, 그 본성도 '사실'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수록된 소설들은 보여주고 있다. 숨겨진 '사실'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가치가 이야기의 속성이며 논픽션과의 경계를 이루는 소설의 핵심적 장치다. 치열한 탐색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기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기호는 보다 리얼리즘에 근접해진 모습을 통해 이야기 되어지지 않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