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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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심 없이 가지는 신념 중 하나가 '원조'는 무엇이든 그 이름값은 한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부차적인 창작물을 통해 변용되어 오고 있는 흡혈귀를 지금의 모습으로 처음 탄생시킨 것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다. 지금은 흡혈귀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해진 '드라큘라'라는 고유명사의 위상만 보더라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받아야 할 찬사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 찬사는 이 모든 것이 이 소설에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하는 예우같은 것이 아니다. <드라큘라>는 공포 소설의 필수요건인 섬뜩한 긴장감을 작품 전반에 걸쳐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공포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크게 기대할 수 없는 품격마저 갖췄으니 명쾌한 헐리우드식 액션 활극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입맛은 물론 문체의 가벼움 때문에 장르소설을 멀리해오던 사람들의 눈높이까지 충족시킨다. 

 

드라큘라는 소설 속에서 자연의 힘을 이용하며, 동물을 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모습을 바꿀 수도 있는 불사귀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가 희생자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드라큘라가 희생자를 지배하는 모습은 물리적인 차원을  벗어난다. 단순히 희생자의 피를 빨아 죽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끈질기고 집요한 방식으로 희생자의 영혼을 옭아매어 마음대로 조종할 뿐 아니라, 죽어서까지 안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 소설 속 최초의 희생자인 루시가 드라큘라의 힘에 굴복해가는 과정은 숨쉴 틈없이 긴박하면서 섬뜩하다. 반기독교적 상징으로 가득찬 이 불사귀는 엄숙주의가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 대면 명확하게 '악'의 극단에 놓이는 존재다. 코폴라의 영화와는 달리 브램 스토커의 원작에서 드라큘라는 일말의 자비도 인간미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원색적인 욕망만 남은 존재다. 따라서 신의와 의리, 선의 실천에 대한 당위로 똘똘 뭉친 반 헬싱 박사 일행과는 선악의 경계를 두고 명백히 대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악의 도식적인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행보는 결말을 쉬이 예측할 수 없게 한다. 작가가 드라큘라의 속성을 어찌나 디테일하게 창조했으며, 그 속성들에 맞서 싸우는 반 헬싱의 비책은 또 어찌나 치밀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의 긴장감은 드라큘라가 좀처럼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데서 온다. 소설 <드라큘라>는 일기, 편지, 전보, 신문기사 등 인물과 인물을 넘나드는 기록의 연쇄로만 이루어져있다. 드라큘라의 존재는 이러한 기록 속에서 언급되고 있을 뿐이므로 객관적이지 않음을 전제한다. 게다가 기록의 속성 탓에 소설의 서술 방식은 대체로 회고적이다. 모든 중대한 사건은 발생한 뒤 다소의 시간이 지나 인물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쳐 기록된다. 기록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들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서술방식으로 인해 독자는 결코 드라큘라의 참모습과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런 감추어짐의 효과는 상상력을 부추겨 드라큘라를 더 강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오늘날 뱀파이어 장르물은 아류라 불리거나 브램 스토커 소설의 스핀오프로 여겨질만한 영역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 자체로 엄청난 성취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질적 깊이에 있어서 이 원작의 품격을 위협할만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드라큘라>는 공포소설이자 환상문학의 범주에 놓여있음에도 그 문학성으로 인해 품위있는 고전으로 분류된다. 영상의 도움이 없이도 고딕 소설의 전형다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깊이 있게 묘사해내고 있으며,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훌륭하게 재현한다. 또 수기체 형식의 서술은 인물들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음에도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 특히 섹슈얼리티와 성스러움의 양극단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대비효과는 이 소설이 이룬 가장 큰 성취다. 이 작품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여 텍스트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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