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뉴욕 브루클린의 '선셋 파크'라는 곳은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쇠락한 지역으로 사람들이 떠나가는 곳이다. 선셋 파크의 묘지 앞 버려진 집 안에 무단침입 해 살아가는 네 명의 젊은이들이 있다. 극심한 불황기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 젊은이들은 사랑과 일, 과거와 미래 앞에 좌절해 저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다. '선셋 파크'는 그 이름과 달리 갈 곳 없는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준다. 과거 사건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만 찍으며 살아가는 마일스, 파괴적인 기질로 번번이 연애에 실패하는 빙, 극심한 생활고와 의지가 되어주지 않은 남자친구로 인해 힘겨워하는 앨리스, 실패한 연애의 기억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엘런이 그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일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각자의 돌파구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며 젊음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건강성을 꾸준히 내비친다.
 
선셋 파크의 네 젊은이들과 마일스의 가족, 또 이들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은 긴밀하지는 않지만 정교한 소설적 장치에 의해 절묘하게 연결되어있다. 폴 오스터는 특유의 도회적인 감성으로 지적인 연대감이 인간관계에 얼마나 호의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마일스와 필라는 <위대한 개츠비>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부터 사랑에 빠진다. 문학도인 마일스의 아버지 모리스는 <리어왕>의 코델리어의 대사를 인상적으로 표현해낸 여배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앵무새 죽이기>에 대한 아들의 심도 있는 평을 듣고 강한 부성애를 느낀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지성을 가진 마일스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고, 마일스도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를 줄곧 높게 평가한다. 이밖에 작가인 렌조, 마일스의 양어머니 윌라 등 많은 인물들이 지적인 탐구를 통해 인간관계의 연대에 대해 모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까닭에 작품 속에서는 숱한 텍스트들이 등장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시작으로, <앵무새 죽이기>, <리어왕>, <행복한 날들>과 같은 문학적 텍스트들은 적재적소에 사용되어 인물과 인물의 연대감을 강화시키고 때로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작품 전체를 아우르며 꾸준히 서술되는 작품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망가진 세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앨리스의 논문 속에서, 혹은 렌조와 메리-리의 기억 속에서 꾸준히 상기된다. 이러한 반복은 마침내 현재 이야기의 장면들과 중첩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얻은 외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상처와 겹쳐진다. 전후 젊은이들의 상처와 맞물리는 불황기 젊은이들의 고뇌는 그 근원은 다르지만 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처가 한 개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깊은 상실감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폴 오스터가 시도하는 상호텍스트성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소설 <선셋 파크>는 그 서술방식에 있어서도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적절히 기능한다.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각 장마다 초점을 달리하여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앞 장에서 감추어졌던 인물의 내면은 초점이 그 인물로 옮겨오면서 이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감춤과 드러냄의 완급조절은 소설의 묘미를 살려준다. 작가는 필라의 입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에 대해 ‘유일하게 자기 외부를 볼 줄 아는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폴 오스터는 작품 속 모든 인물에게 초점화자의 자격을 부여하면서 각자의 연민과 이해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선셋 파크>는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소설은 상처 그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일스가 <앵무새 죽이기>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삶에서 상처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인물들은 그 상처를 치유해가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성장해간다. 소설은 현실의 상황이 개선되는 모습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이 얼마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인물의 내면의 긍정적인 변화와 함께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오히려 그것은 삶을 작위적으로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긍정적인 개진은 ‘선셋 파크’의 몰락과 함께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한다. 소설 후반 마일스와 경찰의 대치는 초반의 보비와의 사건처럼 우발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마일스와 과거의 마일스는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상황이 초래하는 결과는 아마도 같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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