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다양한 실험의 결과물이다. 현대소설은 그 중에서도 개인의 비극적 운명에 관심이 많다. 이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갈구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비극은 카타르시스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비극이 개인의 성격에 의해 초래되는 것일 때 독자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에 비해 환경에 의해 초래된 비극은 절망과 무기력함을 가져다 준다. 그 환경은 대체로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도록 대체로 리얼리즘의 옷을 입고 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진 개인을 쉽게 패배시키는 환경으로 문학작품 속에서 수없이 변주되어 왔던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중국 문화대혁명같은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인간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부커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인도 출신의 작가 로힌튼 미스트리의 대표작 <적절한 균형>도 불가항력의 환경에 의해 무너져버리는 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도인들의 모습은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나 여행잡지의 사진 속에서 흔히 보는 각종 동물들과 오물이 뒤섞인 비좁고 더러운 거리의 이미지를 완성시켜주는 배경정도로 여겨지기 쉽다. 로힌튼 미스트리는 그 더러운 거리 위를 바삐 걸어다니는 수많은 인간들 각각에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넣어 그 풍경화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 한 사람까지도 온전한 삶을 일구어가는 뚜렷한 존재로 묘사된다. <적절한 균형> 속 인물들은 불가촉 천민에 해당하는 차마르 카스트(무두장이), 힌디 문화 속에 섞여 자신들의 문화를 힘겹게 이어가는 이슬람교도들,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수민족 파르시 등으로 각각은 인도 사회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대변한다. 소설은 이들 각자가 가진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속에서 인도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디라 간디의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하는 이 소설은 무력한 개인에게 미치는 불합리한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하층민들의 시선에서 조명한다. 카스트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재봉기술을 배워 삶의 도약을 꿈꾸는 이시바와 옴은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온다. 운명의 한계에 순응하는 수많은 불가촉 천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모습은 존경스럽고 희망적이다. 파르시 공동체의 한 부유한 가문의 딸로 태어난 디나는 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을 차례대로 겪으면서 여성의 사회적 제약을 몸소 느끼게 된다. 보호해줄 남자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가부장적 관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최후의 보호자인 오빠의 손을 벗어나 독립을 꾀한다. 한편 국경 주변의 한적한 곳에서 유년을 보낸 파르시 공동체의 소년 마넥은 그 앞에 놓여진 환경과 당연한 듯 정해진 미래에 무력하게 순응한다. 억지로 오게 된 기숙학교에도 염증을 느끼나 끝내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지 못해 학교에 머문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몸소 겪었던 인도 정치의 불합리성에 대한 인식은 그의 가슴에 불씨로 남아 언제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운명을 옭아매는 관습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갖고 살아온 이들이 한 공간으로 모이게 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삼촌과 조카의 관계지만 부자지간만큼이나 돈독한 이시바와 옴, 같은 종교의 높은 카스트들에게도 외면받는 하층민인 이들에게 편견없이 손 내미는 이슬람교도 아시라프와 조로아스터교도 마넥, 이들을 가족으로 포용하는 디나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도적 해결책을 꾸준히 모색한다. 도시미화 명복으로 비좁은 트럭 안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노숙자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을 하나의 희생자라는 전체로 바라보기보다 개체로서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작가의 시선이 꾸준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동안, 그들을 억압하는 외부의 힘은 점차 강해진다. 이시바와 옴은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꾸준히 보여왔지만, 이들의 몸부림은 이내 좌절되어 가난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된다.

 

결국 <적절한 균형>을 통해 작가는 개인의 비극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몰락은 물론이고 부흥조차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이다. 카스트가 낮은 계급을 억압하는 사람들,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챙기기 위해 빈민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안락한 생활을 통해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사람들 등 폭압과 불합리가 뿌리깊게 자리한 인도 사회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꼬집으며 현실을 차갑게 그려보인다.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문체는 애써 감정에 호소하지 않지만 인물의 희로애락에 따른 감정 이입을 한층 쉽게 한다. 블랙유머나 알레고리, 상징과 같은 기교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리얼리즘 기법으로 서술된 덕이다. 간결한 문체로 사건 중심의 서술이 이루어지고 서술자는 줄곧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작가의 페르소나인 마넥의 심경을 통해 절망감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작가는 마넥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부각시키는 한편, 끝까지 인정을 잃지 않는 디나를 통해 인도주의적 결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지식인들의 무력감보다 오히려 소시민의 인정에서 부조리를 타계할 해결책을 찾는다. 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된 인도사회의 미래를 이들간의 화합에서 찾고자 한다. 다양한 계층과 문화 나아가 종교를 초월한 화합이라는 유토피아를 조심스레 꿈꾸는 듯 보인다. 비극에 대한 설로 시작했지만 이 소설을 무작정 비극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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