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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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는 그간 은희경이 만들어온 어떤 작품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의 냉소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작품군들과도 다르고 이후의 섬세한 감수성과 서정성을 보여주는 작품들과도 또 다르다. 작가 스스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지평을 열기 시작하는 첫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기성작가가 보여주는 신작 치고는 상당히 젊은 감각을 뽐내고 있다. 주인공의 연령대만 어려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형식 등 모든 측면에서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패기가 느껴진다.  

작품의 모티프를 이루는 것은 한 힙합 가사이다. 17세 소년과 힙합의 조합이라니. 비행과 반항으로 가득 찬 미성숙한 존재의 터프한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을 위로해줘>는 발랄하고 통통 튈지언정 터프하지는 않다. 작가는 터프함이 제거된 자리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메워 넣는다. 17세 소년의 성장담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극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은희경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새의 선물>이 떠오른다. 그러나 <소년을 위로해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새의 선물>과 닮은 점이 그다지 없다. 서술자의 성별과 나이에서 차이가 있지만, 좀 더 본질적인 차이는 그 서술방식에 있다. <새의 선물>의 12세 소녀 진희는 연령에 비해 성숙한 사고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어린 서술자는 어른들의 내밀한 생의 비밀까지도 포착해낸다. 그래서 이 책은 12세 소녀의 시선을 빌렀을 망정 어른들의 이야기로 읽히는 측면이 강하다. 반면 <소년을 위로해줘>는 17세 소년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서술은 17세 소년이 보고 느낄 법한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17세 소년의 표현의 미숙함으로 인해 삶의 내밀한 속살은 간단히 표면화되지 않는다. 감정 또한 지나치게 미화되지 않는다. 문장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작가는 서술에 그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고 소년의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때문에 등단 20년을 넘어선 여성 작가의 목소리는 작품 속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과분한 지성과 완벽함을 부여받지 못한 미성숙한 17세 소년은 그래서 더 진솔한 내면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인다. 구어체의 서술은 독자를 향한 설명이기보다 자기 내면의 중얼거림에 가깝다. 연결어미나 명사형 종결어미로 끝맺는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은 17세 소년의 내면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방식으로 보인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서술의 파격성은 정통성을 걷어낸 독특한 방식의 음악인 힙합과도 일맥상통한다.  

싱글맘과 단 둘이 살아가는 17세 소년 연우는 이사와 전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삶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단숨에 마음을 잡아 끄는 힙합 음악 하나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독고태수와 이사 온 자신의 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학생 채영의 존재는 연우의 새로운 삶 속에 강하게 침투한다. 여전히 소녀같은 여린 심성을 지닌 어머니 '신민아씨'와 그녀의 7세 연하의 애인 '재욱형'은 연우 주변의 몇 안 되는 어른이지만, 소설에서는 어른으로서이기보다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소년의 곁에 존재한다.  

소년은 달린다. 미래를 위해 달리고, 사랑을 위해 달리고,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달린다. 기뻐서 달리고, 울 수 없어서 달린다. 달리기는 소년에게 하나의 의식이다. 성장하는 것처럼 답이 분명하지 않은 삶의 과정 속에서, 소년은 해답을 구하려 애쓰는 대신에 거리를 끊임 없이 활주한다. 정답을 내어 줄 누군가의 존재가 소년을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통해 스스로를 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스스로 성장한다. 소년의 아픈 성장에 든든한 조력자는 없다. 이 책 <소년을 위로해줘>에서는 아이들을 포함해 모든 존재가 조금씩은 불완전하게 그려지고 있다. 외아들 연우를 방목하다시피 키워 온 젊은 엄마는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 갈등하고 학부모로서의 정체감을 키워나가는 중으로 그 자신만의 문제에 깊이 빠져 있다. 엄마의 애인 '재욱형' 또한 용감한 이단아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로 한탄하는 중이다. 결핍 없이 완전해 보이는 태수의 부모님과 채영의 부모님 까지 완벽함이라는 껍질 속에 감추어진 균열로 인해 고뇌한다.  

이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이든 어른이든 할 것 없이 나름의 이적을 보이고 있지만, 대체로 미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상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행동이나 대사에도 멋부린 흔적은 없다. 그들 중 누구도 온전히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의 주체와 조력자 간 경계는 불분명하다. 강연우를 중심으로 그와의 영향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에 조력자의 역할을 떠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조력자의 역할은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민아씨'나 '재욱형'이 무심코 던진 조언들의 의미를 되새겨봄직함도 하지만 이들 또한 어른으로서도 완성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연우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년은 스스로 자라난다. 온 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배운다. 우정이라든지 사랑 같은 관계의 완전함을 위해 달리기와 힙합 같은 열정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투신한다. 책에는 '힙합 따위'를 듣는다고 쏘아붙이는 어른도, 공부보다 '연애질'에 목을 맨다고 질책하는 어른도 없다. 현 교육체제에서 고등학생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입시와 성적 따위의 암울한 그림자가 걷히고 소년의 세계는 다소 낭만적인 색채를 덧입는다. 소설 속에는 성장에 반드시 수반되는 조력자가 제거된 대신, 스스로의 성장을 훼방놓는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기제가 최소화되어 있다. 스스로 뛰어들 수 있는 모든 일에 투신하고 '그야말로 세계는 이렇게 넓어지는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소년의 성장이 시작되는 시점일 것이다. 급작스러운 진리나 교훈에 대한 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남과 이별과 슬픔 따위의 감정의 소비만으로도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 성장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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