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범신의 <은교>를 접했을 때, 지독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그것을 칭하는 말은 하나지만,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때로는 범속하고 위험한가 하면 치명적이고 관능적이다. 소설에는 이 모든 욕망의 빛깔들이 어우러져 강한 색채를 뿜어낸다. 이 책은 모든 감각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눈으로, 가슴으로, 전신의 감각으로 읽히는 책이다. 애초 이 책을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오인했던 것은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감각적인 관능의 미학 탓이리라.  

작품 속에서 에로티시즘 속에 감추어진 예술가의 고뇌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세의 소녀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노시인의 노트에서 줄곧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느닷 없이 찾아 온 당혹스러운 애욕을 둘러싼 예술적 탐색이다. 은교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한 마디로 치명적이다. 그러나 일생에 처음 찾아온 진실한 사랑이 하필이면 5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물리적 간극을 감내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은 애초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의 영혼을 자극한 하나의 큰 사건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굵직한 갈등의 한 가운데는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소설에는 시인의 노트와 함께 시인의 제자이자 스승과 동일한 대상을 갈구했던 서지우의 노트가 교차되며 나타난다. 두 개의 노트는 하나의 대상을 향한 두 개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이라면, 하나는 탐미적이고 보다 영혼에 가까이 닿아있는 욕망이다. 두 욕망이 만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은교라는 인물이다. 두 남자의 욕망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은교는 어쩌면 이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오랜 동안 이어져 온 애증의 씨앗이 은교라는 촉매제로 인해 비로소 싹을 틔운 것일 뿐. 욕망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위장한 채로 말이다.  

작가는 온갖 외적인 틀을 벗어던지고 본능적인 욕망 자체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욕망은 사회적 용인의 범위를 벗어날 때 비난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용인에 대한 잣대가 적용되기 전 자연적 욕망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시인의 말처럼 욕망은 어떤 물리적 조건과 관계 없이 공정하게 찾아온다. 이를 규정짓는 것은 제도화되거나 암묵적으로 수용되는 틀이다. 이것이 17세 소녀를 사랑하는 노인의 마음을 비난할 수 있게 하는 매커니즘이다. 서지우의 욕망이 좀 더 통속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틀로 인해 욕망의 본질을 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시인과 서지우의 갈등은 더 젊고 덜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본질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육체의 노예는 '썩은 관'에 지나지 않는 노시인이 아닌 육체적 우월함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서지우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시인의 욕망은 외적으로는 그러지 못해도 적어도 영혼만은 일체의 제약에서 벗어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시인의 노트에 묘사된 은교는 강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쌔근쌔근, 뽀르르, 뽀드득뽀드득, 쫑쫑쫑' 같은 양성모음의 감각어와 함께 묘사되는 은교의 생동감은 쇠락한 노시인의 육체와 정신을 일깨운다. 시인에게 있어 은교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는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그것이 17세라는 나이의 정체이며, 결국 70세와 17세라는 물리적 간격은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다.  

시인의 노트에 기록된 은교는 기실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은교는 세속의 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린 '보통 여자애'에 불과하다. 치정극에 등장하는 흔한 팜므파탈도 아니고 17세의 발랄한 생명력을 제외한 다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은교는 하나의 상징, 즉 위대한 예술정신의 구체적 발현체로서 작품 속에 존재한다.  

결국 은교는 시인과 서지우가 애타게 갈구하는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둘 사이에 감추어진 갈등을 발현케하는 대상이다. 은교를 통해 시인의 탐미적 예술성이 발현되고 재능을 갖지 못한 예술가의 열등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서지우의 노트에 묘사된 세속적 욕망이란 사회적 권위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갈구이다. 시인의 노트에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타나는 욕망 자체의 예술적 승화와는 반대로 서지우의 노트는 현실적 애욕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서지우의 세속적 태도의 이면에도 스승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존경, 양심이 존재한다. 서지우는 은교를 탐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몰두하는 은교'를 탐함으로써 예술적 열등감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 또한 은교를 탐한 것보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우둔함에 대해 더욱 큰 형을 선고하고 있음에서 이들의 갈등의 실체는 분명해진다.    

젊음과 숨막히는 관능이 일깨운 예술가의 치명적 사랑은 비극으로 종결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한 비극이 아니라 사제 간 재능과 욕망의 간극이 불러 일으킨 비극이다. 스승과 제자의 비극은 은교를 둘러싼 서로 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다. 은교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 은교로 인해 감추어진 그들의 진실이 결국 비극의 실체인 것이다. 스승의 사형 선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제자나 마지막 면죄부를 외면하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스승의 모습이 그것이다.  

유미적 텍스트와 치정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순수한 영혼을 향한 두 예술가의 갈망이다. 은교의 존재는 때로는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때로는 수치심을 자극한다. 한 여자를 둘러싼 두 예술가의 자기고백적 노트는 그들의 내밀한 욕망과 예술적 갈망에 대해 적고 있다. 그 예술적 갈망은 이들의 노트를 불 태운 은교에게로 전이된다.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노인을 유혹하던 소녀는 노인의 영혼을 상속받아 '죽은 다음에도 살아'있기를 바라는 노인의 갈망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