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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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는 대체로 가족 간의 불화와 반목, 이해와 화합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플롯을 갖는다. 여기에 적절한 감동과 건전한 주제의식은 기본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감정의 과잉에 거부감이 없다면 눈물샘을 짜내는 신파도 어울린다. 특히 가족의 의미가 퇴색해 버린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가족이란 보편적인 화두에서 출발하여 극단의 정서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 가족의 참의미의 재생을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 같은 가족사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모든 준비가 갖추어 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가족의 반목과 화해의 과정을 그리면서 독자를 감화시키고 가족의 참의미를 되묻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모든 재료를 다 갖추어 놓고, 의외의 방식으로 요리해 내 놓은 작가가 있다. 등단 6년 만에 새 장편 소설을 들고 돌아온 천명관이다. 그의 전작 <고래>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그가 가족이라는 소재를 결코 평범하게 풀어내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화 가족>은 우리가 가족 이야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을 파괴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 뭔가 뒤틀리고 억지스럽고 투박하다. 그러나 천명관이 전작에서부터 밟아온 기이한 행보를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완벽하게 극화된 인물들이 끝없이 기이한 행각을 펼치던 소설 <고래>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는 뻔한 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하나다. 아마 그의 얼굴에는 "정해진 건 없다"라고 써 있는 건 아닐지.

소설은 각자의 삶을 향해 집을 떠났던 남매들이 몇 십년이 흐른 뒤 다시 한 집에 모이게 되면서 시작된다. 칠순을 넘긴 노모 밑으로 기식하러 들어오는 중년의 세 남매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에 오히려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들어온 남매들의 애처러운 상황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동정어린 감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과 5범에 하는 일 없이 식량을 축내며 방귀만 뿡뿡 뀌어대는 120키로 거구의 첫째 오함마,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루어 놓은 것이라곤 10여년 전에 세기의 졸작영화 한 편을 만든 것이 전부인 둘째 오인모, 바람을 펴 두 번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들어온 막내 미연에 발랑까진 그녀의 딸까지 합세해서 평균나이 사십 구세인 가족. 우여곡절 끝에 스물 네 평 아파트를 채운 다섯 가족의 훈훈한 이야기가 바야흐로 펼쳐진다고 하면 좋겠지만 이야기 속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피자 한 판을 시켜 삼촌에게 한 조각 건네지도 않고 혼자 먹어치우는 조카, 조카의 비행 현장을 포착해 그것을 빌미로 조카를 삥뜯는 삼촌, 조카의 속옷을 훔쳐내 수음을 하는 삼촌,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새 남자와 일을 벌이는 여동생. 이 가족의 일상은 이렇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는 막장 가족이 알고 보니 더 막장이더라는 기막힌 이야기다. 소위 막장 드라마가 욕먹는 이유는 갈 데까지 가본다는 식의 배짱 때문이다. <고령화 가족>은 뻔뻔스럽게도 그런 식의 막장 코드를 아주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고래>의 능청스러운 화법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것도 바로 이 막장코드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사실적인 삶에 근접해 있는 대신 상상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말도 안 되게 막 나가는 가족이 탄생한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스무 명 남짓 되는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아 옷대신 거적때기를 덮어 키우는 흥부 이야기도 오늘의 기준에서는 막장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천명관은 터무니 없는 일들을 늘어 놓으며 '이것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 한 편의 막장드라마도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은 지니고 있다. 오로지 시선 끌기만을 위한 자극성 소재의 나열은 아니라는 점에서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 웬수처럼 지내던 형 오함마의 극적인 인생역전에 통쾌해하는 나(비록 그 결과가 참혹한 폭행으로 이어진다해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꺽꺽 울음을 터뜨리는 오함마, 난봉꾼 같은 삼촌에게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조카. 막장 가족에게 한 가닥 가족애가 비치는 순간 유쾌한 웃음은 찡한 감동으로 변한다.   

에둘러 가고 있지만, 결국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로 되돌아 간다. 삼 남매가 한 집에 모이게 된 난감한 사건(?)을 겪고도 오히려 들뜬 마음이 되어 매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차려내는 어머니는 흔한 가족 드라마의 헌신적인 모습 그대로다. 아닌 척 하지만 이 가족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낸다. 이렇듯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희생은 결국 이들이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가족 안에는 모든 형태의 가족이 공존한다. 핏줄을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가족도 이 안에 존재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과 결혼을 통해 새로이 가족 구성원에 편입된 이도 존재한다.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었든 결국 이들 가족은 동일한 운명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가족의 이상적인 형태를 말할 때, 가족의 형성 과정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혼, 입양 등의 특수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가족들에 대한 편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작가는 이 가족의 모습을 통해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가족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낡은 소파 위에 앉아 이 가족에 대해 억측을 늘어 놓는 할머니들을 욕하려거든 겉만 보고 한 가족을 판단하는 그 모습이 혹시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예기치 않게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마련해 두고 도무지 심각해질 순간을 주지 않는다. 딸의 가출을 알게 되는 심각한 순간에 엉터리 맞춤법의 편지가 발견된다든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장한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 유치장으로 장면이 전환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 사람 웃기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고래>에서 각종 법칙을 나열하며 잡다한 사건에 대한 서술을 대신했다면, <고령화 가족>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쓰여진 한 줄 요약글을 통해 구구절절한 인물 소개를 대신한다. 서술을 아끼는 대신 버라이어티한 대중 문화의 요소요소를 적절히 차용한다. 막장 일일 연속극으로 출발해서, 중년남자의 애환을 그린 인간극장이 되었다가, 청소년들의 비행 현장을 추적하는 피디수첩이 되기도 한다. 또 황당한 첩보영화가 되는가 하면 어이없는 촌극을 그린 시트콤이 되어 빵 터지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문제적 인물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전통적인 소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형식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소설 쓰기는 근대를 거슬러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전통에 오히려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야이기꾼'으로서의 그의 특출난 자질은 여전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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