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 맹목적이고 순수한 감정일진대, 언제부터인가 통속적이라는 오명을 쓴 채 보다 고차적이고 수준 높은(?) 주제 뒤켠으로 물러나 있다. 최근에는 소위 순문학이라고 칭해지는 작품들 중 '사랑'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가면 사정이 다르다. 과거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괴테, 빅토르 위고, 제인 오스틴 등 수많은 작가들이 사랑의 본질적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해 왔고, 이들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공을 초월한 힘을 가졌다는 말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은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삼각관계, 불륜, 집착으로 점철된 사랑 이야기다. 이쯤되면 지극히 통속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순수'라는 범주 속에 묶는다. 이는 작가가 문학 분야의 가장 권위적인 상으로 여겨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데서 오는 당당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랑이 순수한 이유는 내외적 조건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흔들림 없는 사랑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사랑을 위해 인생을 모두 건 남자의 이야기다. 1970년대 터키 상류층 사회에 단단히 자리잡은 30세 남성 케말은 완벽한 여자와의 약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재회한 어린 친척 퓌순과 강렬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만나는 완벽한 약혼녀와 주저 없는 열정을 분출할 수 있는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던 케말은, 예정된 대로 약혼식을 올리게 되고 약혼식 이후 퓌순은 케말에게서 모습을 감춰버린다. 이후 떠나버린 퓌순의 빈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케말의 처절한 고독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케말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묘사는 퓌순이 떠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일체의 제약을 벗어던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더없이 치밀하게 묘사해낸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하나의 독서물을 교묘하게 박물관으로 둔갑시킨다.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긴 토로를 읽는 독자는 어느 순간 그 사랑이 거쳐온 모든 기록이 전시된 박물관을 관람하는 관람객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케말은 사랑의 환희, 고통, 상흔까지도 박물관에 진열한다. 퓌순의 입술이 닿았던 물건, 그녀의 손이 스친 물건, 그녀가 스쳐지나간 모든 흔적들은 케말이 품어왔던 극진한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들이다. 진열된 물건들은 평생 지속되어 온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흔적들을 '순수'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전시물에서 단순히 사랑의 흔적만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중반, 변화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당시 터키인들의 머뭇거림을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성과 결혼에 대한 풍속도에는 당시 터키사회가 겪었던 문화적 혼란이 내재되어 있다.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곤 하지만 그 적나라한 길이가 여전히 불편한 사회, 자유연애를 인정하면서도 혼전 관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너그럽지 못한 사회, 이런 터키인들의 이중적 시선 속에서 순수한 사랑이 용인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작가는 치밀하게 그려낸다.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과 이슬람 사회의 전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겪는 터키 상류층들의 아노미는 케말의 맹목적인 사랑의 감정과 대비되며,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완성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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