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베이니 가족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민승남 옮김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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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릴 것이다. 가족은 개개인의 삶의 크고 작은 부분에 끊임 없이 관여하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멀베이니 가족>은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해체되고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리며, 그것이 가족 구성원 각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방대한 서사 속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멀베이니 가족이었다(We were The Mulvaneys).' 이 소설의 첫 구절이자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이 과거형의 문장 속에 멀베이니 가족의 영화가 함축되어 있다. 소설의 전반부에는 1970년대 중반 뉴욕주의 한 소도시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타인의 부러움을 받았던 멀베이니 가족의 자긍심 넘치는 삶이 막내 아들 저드의 눈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된다. 맨 손으로 멀베이니 지붕 회사를 설립해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떠오른 가장 마이클 멀베이니와 굳은 신앙심과 타고난 자애로움으로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그의 아내 코린, 그리고 네 자녀의 이상적인 삶이 그림같은 하이포인트 농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곧 외동딸 매리앤이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가족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든 가족을 충격으로 몰아 가는 그 사건으로 인해 사랑과 신뢰로 똘똘 뭉쳐져 있던 가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더 없이 단단하고 이상적인 가족은 점차 붕괴되어가고 가족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소설은 해체된 각각의 가족 구성원이 사는 방식을 묘사하면서, 가족을 벗어난 그들의 삶도 가족이라는 올가미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치열하게 묘사한다.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갈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매리앤은 물론이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둘째 아들 패트릭 조차도 자신이 일구어 가고 있는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소설은 가족의 아웃사이더였던 패트릭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펼치는 것으로 한 번의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이들 가족은 서로를 상처입히지만 결국 가족이란 운명공동체 안에 속해 있음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상처 받고 무너져 내리는 가족 구성원들의 방황의 종착지는 가족일 수밖에 없다.

마이클 멀베이니의 몰락을 통해 극대화되는 이 가족의 비극은 공허하면서도 동시에 꽉 찬 슬픔을 느끼게 한다. 큰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날, 더러운 자신의 방에서 깨어난 마이클 멀베이니가 백마를 탄 아이들에 대한 환상에 젖는 장면은 처절하게 슬프면서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명장면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비극의 마지막 순간 비춰지는 가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슬픔을 극대화시킨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존재이지만,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된 것이 마이클 멀베이니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유형을 떨치고 차 안에 숨어 자신이 살아온 마을과 농장의 모습을 훔쳐보는 매리앤의 간절한 모습이 펼쳐지며 가족공동체의 숙명에 대한 주제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20여년이 흘러 마침내 해후를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은 누가 뭐라해도 '멀베이니' 그 자체다. 이 책은 또한 한번 무너지기는 쉬우나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한 행복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가 가족 서사는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족 서사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들어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뿌리를 부정한 채 혼자서 완전한 존재일 수 없다.

<멀베이니 가족>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그리듯이 생생하게 묘사되는 배경, 방대한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잡고 있는 인물, 긴 시간 동안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사건의 개연성, 아름다운 언어와 그 언어가 함의하는 다양한 상징 등. 게다가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난 듯한 한 시대의 철저한 복원으로 인해 멀베이니 가족의 역사는 상당한 진실성을 부여받는다. 이 모든 것들은 단단하게 응집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 속에서 완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인물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자신의 서사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때, 그 작가는 독자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가 거장으로 칭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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