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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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는 <심플 플랜>으로 유명한 스릴러 작가 스콧 스미스가 13년만에 발표한 호러소설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장편소설이지만 플롯은 단조롭고 줄거리는 단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스펜스는 500페이지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  재미로 시작된 행동이 걷잡을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해갈 때 독자는 이야기가 끌어당기는 힘에 완벽하게 매료된다.

이야기는 멕시코를 여행중인 젊은 미국인 남녀 두 쌍이 그리스인과 독일인 친구를 만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폐허를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독하게 더운 멕시코의 날씨와 오래 길들어진 나태함 때문에 이들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다. 폐허를 찾아가는 동안 내내 수상한 기운이 감돌지만, 단 한번도 불가해한 현상과 직면해 보지 못한 현실적이고 모험심 강한 이 젊은 여행객들은 그들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목적지로 보이는 한 언덕에 이르렀을 때, 무심하던 마야인들이 무기를 장전한 채 그들을 저지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실수로 그들은 언덕에 발을 딛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들을 저지하던 마야인들은 오히려 그들을 언덕 위로 몰아 넣기에 이른다. 언덕 위로 올라 온 여섯 명의 여행객들은 덩굴 밑에서 죽어나간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언덕 주위는 마야인들이 포위하고 있고 언덕 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출구 없는 막다른 상황에 몰린 주인공들에게 본격적인 공포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밀실 공포물 같은 줄거리는 딱 헐리우드 영화감이지만, 단언컨대 이 작품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스토리텔링이 아닌 인물들의 변화해 가는 심리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 뿐 아니라, 각각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이들의 내면 모습은 사건을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이 교차되며 때로는 장황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유일하게 그들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인들'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를 더 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공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간을 잠식해 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의 무게는 공포를 유발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 그 자체에 실려있다.

공포의 실체란 무엇인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공포를 유발하는 하나의 계기일 뿐, 공포 그 자체는 아니다. 공포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수많은 다른 감정들을 통해 드러난다. 강박관념, 질투, 무관심, 의혹, 자책, 절망 같은 내면의 감정들이 곧 공포의 실체다. 그런 것들이 점차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할 때, 그것이 공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폐허>의 공포는 급작스럽게 놀래듯이 찾아오지 않고, 서서히 온몸을 죄듯이 찾아온다.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인물 각각의 성격과 심리는 공포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사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의 성격은 곧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에이미의 철 없음이나 제프의 책임감, 에릭의 소심함과 스테이시의 나약함이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되새겨 보라. 이들의 운명은 결국 그들이 자초한 모든 것에 대한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수준급의 심리 묘사 못지 않게 이를 줄거리에 교묘하게 짜맞추는 능숙한 솜씨는 <폐허>를 최고의 호러소설이라는 찬사에 어울리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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