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은 대단히 논리적인 작가다. 문학과 논리란 것은 썩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톤 체홉의 말을 떠올려 보라. "작품의 시작에 벽에 못이 박혀 있는 얘기가 나오면 작품 말미에서 주인공이 그 못에 목을 매게 되어 있다"라는.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추려진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존재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는 불필요하거나 불명확한 장면이 없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없다. 배경, 인물, 대사 무엇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언 매큐언이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소설가 지망생 소녀의 깜찍한 상상력이 선량한 두 사람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사리분별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12세 소녀가 어른들의 운명 전부를 바꾸어 버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속죄>의 1부를 읽노라면,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과정에 자연히 수긍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지'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이 생겨나게 된 것에 모든 발단이 되는 이야기들이 불과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일임을 알았을 때에는 또 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 속에는 차츰차츰 옥죄어오는 긴장감이 있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흘리지 않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느리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인간 내면의 세밀한 심경 변화마저 예리하게 포착해내느라 이야기가 간혹 멈추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반복적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흡인력은 상당한 데 반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흠이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1부의 느린 전개야말로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인물 하나하나의 세밀한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사소한 우연이 만들어낸 비극을 개연성있게 풀어나간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어찌나 정확하게 포착해 냈는지, 인간 심리에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작가정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까지의 길지 않은 순간을 세밀하게 그리며 결과보다 원인의 서술에 더욱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든 현상은 외부의 상황 때문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결과만으로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할 수 없다. 지리한 심리 묘사의 과정 동안 이 소설은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파멸시킨다면 그것을 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브리오니의 모든 행위는 선과 악의 아이러니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내가 무심코 행한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진리에 눈 뜨게 한다.  

<속죄>는 한 사람의 지난한 속죄의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가슴아픈 러브스토리이다. 사랑을 확인한 순간 이별의 고통을 맛 봐야 했던 가슴 아픈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드러나는 작은 반전으로 인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단 하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브리오니의 속죄가 그토록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두 연인을 끈질기게 묶어 주었던 세실리아의 '기다릴게, 돌아와'라는 한 마디는 그 어떤 위대한 맹세보다도 더 큰 울림을 주며 소설 속 분위기 전체를 지배한다.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은 <속죄>를 통해 또 한번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다. 영어권 작가로서 이언 매큐언이 그만큼 주목 받고 있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 명성만큼 그의 작품은 모두 일정 수준의 만족감을 준다. 그 중에서도 백미로 <속죄>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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