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 동안의 남미 - 열정에 중독된 427일 동안의 남미 방랑기 시즌 one
박민우 지음 / 플럼북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를 하나만 대라면 대리만족의 추구일 것이다. 내가 직접 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돈, 시간, 체력, 집안의 눈치까지 생각하면 쉽사리 배낭을 꾸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니 책에서 '여기 무지 좋아'하는 자랑이 아니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괜스리 부럽고 설레는 것도 사실이어서 그 여행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자연히 여행 에세이에 손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주관적인 단상만을 한없이 늘어 놓아 독자의 동참을 원천봉쇄하는 자아도취성의 글들이 범람하는 탓에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는 찾기 어렵다.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란 어설픈 아포리즘이나 사진 따위로 지면을 온통 메우며 자신의 경험을 잔뜩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여정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여행지의 생생함과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그런 책을 말한다. 어느모로 봐도 개인의 체험에 대한 기념적 기록으로 남긴 듯한 인상을 주는 책들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것이지 잘 꾸며 놓은 남의 미니홈피를 구경하고 싶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박민우의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그런 내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여행 에세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오지 탐험을 늘 꿈꿔왔던 나에게도 남미는 그다지 흥미를 안겨 주지 못하던 지역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가장 요원한 지역이므로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1만시간 동안의 남미> 제 1권이 내 손에 들어온 뒤에도 나머지 두 권을 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덧 작가의 서툰 여행의 적극적인 동반자가 되어 다음 여정을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오래 전에 접했던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시리즈 이후 가장 흥미진진한 여행 에세이다. 

우선 예쁜 펜시 다이어리를 손에 쥔것 같은 가벼움 대신에 한 손 가득 느껴지는 묵직함이 책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한다. 적당할 정도의 사진과 충분한 활자로 이루어져 있어 내용을 보기도 전에 충실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내용은 더 만족스럽다.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남미라는 여행지에서 겪는 좌충우돌과 길 위에서의 단상, 여행지에 대한 넓은 식견 등을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스운가 하면 뭉클해지는 감동이 있고, 가벼운가 하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장점은 이 책이 매우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겪은 체험 자체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주체 못할 유머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래서 세 권이라는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재미있다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을 철저하게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다.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잘 드러난다. 여행지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과, 그것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할 것에 대한 초조감이 페이지마다 느껴진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지만 묘하게 나 자신의 기억을 오버랩시키는 진솔한 감정 묘사도 일품이다. 이 책은 나 자신에게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마저 쏙 들어가버린 경이로움, 밤차를 타고 떠나며 다시 되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센치해지던 기억, 여행 중 우연히 만난 동행자와 헤어질 때 코끝이 저릿하던 경험까지 생생하게 되살아 나게 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더 이상 젊음을 담보삼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꼭 남미로 떠나고 싶어진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흥분되는 일이니까.

유머러스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장, 웃음과 감동, 지성이 묻어나는 필력을 구사하는 작가이기에 차기작이 될 소설에도 큰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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