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2년간 붐처럼 2~30대 여성의 일과 사랑 따위를 그린 소위 '칙릿'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각종 장편소설상을 휩쓸며 세상에 나왔다. 이제 막 문단에 첫 발을 들여 놓는 신선한 작가들의 작품이 천편일률적인 색깔을 띄고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런 작품들이 대부분 고액의 상금과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그렇게 등장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읽어 보았지만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별다른 문학성도 발견되지 않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심사위원들이 과찬이 민망한 수준의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칙릿'이라는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 평범해서 인터넷 소설을 조금 다듬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 작가들이 자신의 첫 작품 앞에 달린 버거운 타이틀을 견뎌낼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쿨하게 한걸음>은 제1회 창비소설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 또한 굳이 분류하자면 칙릿에 해당하지만 나름의 차별화 전략이 보이기는 한다. 무작정 가볍고 경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성찰이 묻어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30세가 훌쩍 넘어 버린 미혼 여성 연수의 삶 속에 보잘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투영되어 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깊은 공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풀어 놓은 글 속에 작가의 치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늦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중인 주인공 연수를 비롯해 결혼 후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민경, 늦은 나이에 안정된 앞날을 위해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명희, 분방한 미혼의 삶을 정리하고 결혼이란 안전한 울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선영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에게서 그 나이의 여성이라면 한번 쯤 고민해봤음직한 문제거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다. 공감은 가지만 소설 읽는 묘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별다른 사건도 벌이지 않고 그저 의미없이 등장하여 '나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는 의미없이 퇴장한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일인칭 화자인 연수에 의해 소개되기 위해 등장할 뿐 소설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별다른 유기적 관련성이 없어서 다만 오늘날 존재할법한 30대 초반 여성들의 모든 사례를 나열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된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이다. 무려 다섯 명의 친구들을 무더기로 등장시킨 것이 그런 속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사건에 관여하기보다 그 나이의 여성상을 대변하기 위해 특정 부분에서만 한 번씩 등장하고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섯 명의 친구들은 사실 세 명이어도 상관 없고 두 명이어도 괜찮다. 이야기의 흐름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여동생이나 사촌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없어도 그만이다. 어느날 갑자기 집에 찾아온 사촌여동생은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반항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더니 그 후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이 이런식이다. 한 번 등장하여 '그녀는 이렇게 살고 있다'식의 장광설이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오고 나면 화자는 혼자서 그 인물의 삶의 방식에 대해 역시 장황한 총평을 내리며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당대 젊은 여성의 세태를 보여준다고 하기에도 소설적 재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다가 직접화법이 난무하고 결론마저 화자 스스로 지어 버리니 독자가 할 일이 참으로 없다.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소설적 사건이란 기껏 회사를 그만둔다든지 친구가 취업 실패로 자살한다든지 하는 게 전부다. 별 대단한 사건도 없지만 그나마도 사건이 하나 일어날 때마다 구구절절한 해설이 덧붙는다. 소설은 그런 해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30대 여성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결론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모든 현상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통속적인 칙릿 소설이란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아 로맨스를 제거한 듯 보이지만, 차라리 로맨스라도 가미되었으면 소설적인 재미라도 있었을 뻔 했다.  

이 소설의 가장 강점은 강력한 공감대의 형성이다. 수상 후 인터뷰에서 작가는 30대 여성들에게 공감가는 내용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의도라면 120% 성공한 셈이다. 주인공 연수의 독백은 청년 실업에 허덕이는 2~30대의 사고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이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너무 공감이 가면 오히려 거북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의 경우가 그랬다. 마치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 같은 지나친 공감대는 내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불쾌했다. 대학 도서관의 바뀐 시스템을 보고 느낀 자잘한 감상 조차 말이다. 이처럼 지나친 공감대는 내가 쓴 글이 아님에도 내 일기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 같은 거북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 각색된 채였다면 짐짓 아닌 척 할 수 있겠지만 허구적인 사건이 그다지 벌어지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이다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작가의 첫 작품은 자신이 가장 쓰기 쉬운 소재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쓰기 쉬운 소재는 보통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소설적 상상력을 간과하기가 쉽다. 소설은 분명 수필이나 여타의 잡문들과 달라야 한다. 경험에서 우러난 진솔한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력 속에 적절히 녹아들어 있을 때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