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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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당신 인생 최고의 책이 바뀔 것이다.   

책의 띠지에 이렇게 적혀 있지 않았더라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하 '오스카 와오')'을 읽은 내 감동은 단연코 더 컸을 것이다. 무려 인생 최고의 책이 바뀐다는 기대감은 책을 읽는 내내 그 '최고'를 선사해 줄 한 방을 끊임없이 기다리게 했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내 일생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는 '분노의 포도(존 스타인벡)'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어린 순간을 재현하기는 커녕 흉내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실망해야 했다. 좋은 소설에 대한 과장스러운 찬사는 작품 그 자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데 때로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오스카 와오'를 읽으면서 산만하고 불편한 느낌만을 받았을 사람도 있고,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깊은 감동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인생 최고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선입견과 지나친 기대감이 상당히 방해를 하기도 했지만 '오스카 와오'는 꽤 좋은 소설이다. 엉뚱하고 어딘가 뒤틀린 인물들이 황당한 사건들을 벌이고 다니지만, 그 낯선 삶 속에서 문득문득 나와 내 주위의 일상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책의 제목만 보고 판단한다면 주인공의 무척 특별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짐작할지 모른다. 물론 특별하다는 데는 뛰어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짐작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오스카의 삶은 특별하다기보다 오히려 흔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특별하다는 것은 흔하다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인다. 모든 삶은 어느정도는 특별하고 어느정도는 흔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오스카의 삶은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오스카는 SF 오타쿠에 매우 내성적이면서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만을 갈구하는 꼴통이다. 그의 외모는 그 꼴통스런 성격과 잘 어울리게 아름답지 않은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모든 형용사를 다 갖다 붙인 듯 형편없는 외모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형용사 중 한두 개쯤 붙지 않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거나 애정을 갈구하며 멋진 이성과의 데이트 한 번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스카와 같은 '꼴통'은 널리고 널렸다. 혹 아니라고 발뺌하는 사람이라면 유니오르는 어떨까. 바람둥이에 처세에 능하면서 진실한 면도 가지고 있는 인물. 아니면 갑자기 삶에 대해 진저리를 내며 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롤라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쉽게 공감과 동정을 유발한다.

당연히 오스카의 삶이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스카의 삶은 비록 짧지만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숨은 서술자 역할을 하던 유니오르가 작품 속의 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 시점에서 오스카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스카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운명을 자각하고 절망에 빠지긴 하지만,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운명적인 외로움 속에서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해낸다. 저돌적이고 무모한 시도 끝에 천하의 꼴통은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루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오스카 와오의 놀라운 삶이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저주를 보란듯이 무시해 버리고 일생을 통해 바라마지 않던,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쉬운 '그 일'을 어렵사리 이루어 낸 오스카의 집념이야말로 참된 용기이며 진정한 삶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오스카의 그 위대한 삶은 마침내 유니오르를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나라의 모든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독재자로부터 딸을 지키다가 몰락해버린 아벨라르, 갱스터를 사랑하게 된 대가로 사탕수수밭에서 죽도록 맞은 벨리, 엄마의 운명을 답습하여 경찰의 아내가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가로 역시 사탕수수밭에서 죽도록 맞은 오스카. 이들의 대를 이은 억세게 재수없는 운명은 실상 도미니카 공화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어두운 역사와 관계를 맺는다. 뚜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소설을 읽다보면 인류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놀랍도록 유사한 면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스카 와오'도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압제와 억압의 시대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도미니카의 오래지 않은 과거와 억압의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재를 두루 오가며 진행된다. 아벨라르, 벨리, 오스카로 이어지는 고된 삶의 연원을 따지고 들면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이른다. 즉 이 소설은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된 삶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스카 와오'가 소설로서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푸쿠(저주)라는 환상으로 버무림으로써 소설적인 재미를 확장시킨 것에 있다. 어두운 역사의 일면을 심각하게 묘사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에둘러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오'는 기본 서사의 줄기만 따라 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 안에 배열된 메타포와 상징, 세태 풍자의 목소리들을 모두 읽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배경지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특정한 지역의 문화코드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제 3세계의 근대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필요로하는가 하면 낯선 언어와 번역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에 따른 정확한 뉘앙스를 포착해 내기를 요구한다. 낯선 언어들을 혼용하여 쏟아내는 작가의 의도는 문화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는 100퍼센트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에 부딪힌다. 다행히도 많은 주석들이 실려 있어 책을 이해하는데 최소한의 실마리를 던져 주기는 하지만, 정확한 이해를 위해 가독성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책과 각주를 여러번 읽으며 작가의 숨은 의도마저 캐치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와오'는 여러 면에서 애써 고상한 척 하는 소설들과는 거리가 멀다. 투박한 말투,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속어들, 낯선 서술방식 등. 그래서 소설을 읽은 뒷맛이 썩 상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석상의 잘 세공되어 할로겐 불빛 아래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흙덩이 속에서 발견해 낸 원석이 때로는 더 큰 기쁨을 줄 때가 있지 않는가. '오스카 와오'는 그런 원석처럼 투박하고 신선한 매력을 뽐내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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