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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평점 :
'가랑비 속의 외침'은 중국 작가 위화의 첫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허삼관 매혈기', '인생'과 함께 유년-장년-노년으로 이어지는 '인생 3부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랑비 속의 외침'은 구성, 인물, 시점 등 여러 측면에서 위의 두 작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전지적 시점을 활용해 한 인물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추보식 구성을 포기하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삽화적으로 나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성은 유년기 기억의 참모습을 복원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홍차와 마들렌의 달콤함처럼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환멸의 빛을 띠기도 한다. 이런 기억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나쁜 기억도 시간의 옷을 입으면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쑨광린이 '남문'이라는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들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소설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기억의 단편들을 순서와 관계없이 늘어놓고 있다. 이는 실제 기억의 모습과도 같다. 기억은 구체적인 형태가 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뒤죽박죽 나열된 기억들은 쑨광린의 고향인 '남문'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수렴된다. 여기에는 남문을 벗어나 쑨당에서 지낸 5년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5년의 끝은 남문으로의 귀향으로 종결되므로 결국 모든 기억이 남문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남문에서의 기억은 쑤위와의 우정을 제외하고는 환멸스러운 기억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비교적 행복했던 쑨당에서의 기억은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쑨당에서의 기억의 끝은 남문으로의 회귀이다. 하필 환멸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보인다. 기억의 출발점인 고향은 아무리 혐오해도 결국 귀소본능에 따라 되돌아오고야 마는 삶의 원천인 것이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어른이 된 '나'가 서술자가 되어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까지 독자에게 전해준다. 그 기억들은 쑨광린의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심리에 대한 해명이다. 5년의 공백으로 가족 구성원에서 겉도는 쑨광린, 도시의 삶을 동경했으나 남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쑨광핑, 어이없는 사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쑨광밍, 목숨이 쓸데 없이 길어 가족들에게 눈치를 보며 기식하는 할아버지 쑨유위안 등. 가족구성원들의 지난한 삶의 모습은 고향의 연못가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더불어 고향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형성한다.
펑위칭이나 루루의 이야기는 '요람기(오영수)'처럼 기억의 아련한 측면을 건드리기도 한다. 쑤위와의 우정으로 위안받았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는 환멸보다는 애틋함을 자아낸다. 특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그린 부분은 위화 특유의 해학적 문체와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인간과 삶 사이의 질긴 인연에 대해, 피할 수 없는 혈연의 고리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단연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을 자극하는 이러한 에피소드는 위화의 이후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위화 소설의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위화의 첫 장편소설임에도 가장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다.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을 먼저 접했던 사람들은 내면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서사적 골격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이후 작품으로 이어지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해준다. 풍자와 해학, 휴머니즘, 중국 근현대사와 세태에 관한 우회적 성찰 등. 때문에 위화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할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