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편지라는 단어가 주는 풋풋한 설렘은 이메일이 그 자리를 대체함으로 인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메일은 편지에 담긴 정성과 순수한 마음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쓸 내용을 떠올리고 정성스럽게 종이 위에 눌러 쓴 뒤 곱게 접어 봉투에 봉하는 그 모든 과정은 천천히 이루어 진다. 그 순간 동안은 오직 편지를 받을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 편지에 담긴 그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까지 헤아리며 편지를 읽는 기분은 또 어떠한가. 이렇게 모든 소중한 감정들을 실어 나르는 편지가 점차 구시대의 산물이 되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편지 한 통이 그리워지는 요즘, 정성들여 쓴 편지를 받은 것 같은 따뜻함을 주는 소설을 만났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은 168통의 편지가 엮여 이루어진 소설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에서 부터 삶에 대한 생각, 진지한 고민, 내밀한 사연까지 담고 있는 이 편지들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바꾸어가며 각자의 사정을 들려준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편지를 주고받지만 하나의 일관된 사건을 따라가며 줄거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힌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을 배경으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인간 사이의 유대를 회복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던 건지 아일랜드의 사람들은 우연한 계기로 감자껍질파이클럽이라는 문학회를 급조하게 된다. 얼떨결에 시작된 모임이지만 회원들은 이를 통해 문학의 가치와 진정한 유대에 대해 깨우쳐 간다. 한편 런던에서 차기작을 준비하던 작가 줄리엣은 감자껍질파이클럽에 대해 알게되고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줄리엣의 소유였던 찰스 램의 '앨리아 수필선집'이 건지 아일랜드에 사는 총각 도시의 손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이들의 교류는 점점 깊어지고, 줄리엣은 마침내 건지 아일랜드로 떠난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은 때때로 사소한 일을 계기로 일어난다. 줄리엣의 손을 떠난 책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교류가 깊고 끈끈한 유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감있게 그려낸다. 우연히 만들어진 문학회는 서먹했던 이웃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우연히 도시의 손에 들어간 한 권의 책은 줄리엣과 건지 아일랜드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을 이어주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마음을 열어 타인을 받아들이는 소설 속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평생에 걸쳐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존재가 무척이나 절실해 진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책에 대한, 문학에 대한 헌사다.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서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건지 아일랜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머니에 넣어다닐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더없이 소중하게 취급된다. 책들이 넘쳐나고 있어 더러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오늘날과는 대조적이다. 또 문학회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펼쳐지는 이야기인 만큼 소설에는 세익스피어, 찰스 램,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오스카 와일드 등 다양한 다양한 유럽의 문호들이 오르내린다. 이들은 소설속 인물들의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딱딱한 설명조로 그려지기보다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에 관련된 일화는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유쾌하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건지 아일랜드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지만 아픈 상흔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진출을 노리던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5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전쟁의 외압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곳이다. 소설에는 전쟁 당시 건지 아일랜드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비참한 삶이 간간이 드러난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로 인해 아픔의 역사는 무작정 어둡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삶에 대한 긍정이자 문학에 대한 오마주이며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따뜻한 위로이다. 이 책은 무엇이든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귀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고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1940년대 영국의 세태나 풍속들은 잊혀져가는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우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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